조선 중ㆍ후기를 후끈 달구었던 것이 예송(禮訟)논쟁이다. 1659년부터 1679년까지 무려 20년에 걸쳐 치열한 논쟁이 벌어졌다. 오늘의 시각으로 보면 정말 사소한 일을 두고 사단이 벌어졌다.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임금(효종)이 승하했는데, 계모인 대비(인조의 계비)가 얼마나 상복을 입어야 하느냐를 두고 죽기 살기의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예송의 와중에 많은 선비들이 유배를 가거나 사약을 받았다. 우리가 잘 아는 고산 윤선도도 이때 논쟁에 휘말려 귀양살이를 했다. 지금 생각하면 상복을 1년 입으나 3년 입으나 무슨 차이가 있는지 의아할 일이다. 그러나 그 근저에는 원칙의 문제가 깔려있었다. 즉 왕가의 적통(嫡統)과 정통성을 두고 결코 물러설 수 없는 사상투쟁을 벌였던 것이다.
이기이원론을 따르는 남인들은 왕과 사대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입장이었다. 반면 이기일원론의 서인들은 큰 틀로 보면 왕이나 사대부나 모두 지배계급이란 생각이었다. 왕권(王權)중심과 신권(臣權)중심의 물러설 수 없는 논쟁인 것이다. 훗날 일제(日帝)는 이를 사색당파싸움으로 매도했지만, 분명 당시로서는 정통성을 두고 벌이는 생존의 문제였다.
6일 국무회의에서 박근혜 대통령은 사초(史草) 증발에 대해 직격탄을 날렸다. 사초증발을 "전대미문의 일로서 국기를 흔들고 역사를 지우는 일"로 못 박았다. 그동안 검찰은 고발을 접수하고도 정치권의 눈치를 살피느라 사실상 손을 놓고 있었다. 이제 검찰이 급해지게 생겼다. 대통령이 국기문란행위로 규정했는데 검찰이 가만히 있을 수는 없으니 말이다.
집권세력 내부의 큰 흐름은 고 박정희 대통령이나 현 박근혜정부의 정통성에 시비를 거는 세력과는 함께 할 수 없다는 것으로 보인다. 야권 내부의 친노 구주류를 중심으로 대선에 불복하려는 기색이 역력한데, 이를 결코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홍익표 민주당 의원의 귀태(鬼胎)발언, 이해찬 민주당 의원의 "박정희가 누구에게 죽었나" 발언은 도저히 묵과할 수 없다는 것이다.
대선과정에서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는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출마했다"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일본식 이름으로 불렀다. 고 노무현 대통령은 박정희 시대를 빗대어 "정의가 패배하고 기회주의가 득세한 시대"로 규정했다. 게다가 문재인 의원의 "이제와 (박 대통령에게) 책임을 물을 수는 없지만" 발언은 현 정부의 정통성에 대한 시비로 비쳐진다.
절박하기는 친노그룹도 마찬가지다. 5일 국가정보원 국정조사에서 남재준 국정원장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김정일 위원장의 NLL을 없애자는 발언에 동조했기 때문에 NLL의 포기로 본다"고 했다. 노 전 대통령과 친노그룹들은 한 마디로 대한민국 영토를 북한에게 넘기려했던 반역의 도당으로 몰리게 생겼다. 이쯤 되면 불구대천(不俱戴天)이다.
국민들도 지겹다. 밑도 끝도 없는 그들만의 싸움을 왜 지켜봐야 하는지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이쯤에서 휴전을 권하고 싶지만, 이럴 바엔 누가 죽든 아예 사생결단을 내라는 극단적인 말까지 튀어 나오는 마당에 근본적 대책은 아닌 것 같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그냥 봉합하고 넘어가면 언젠가는 또다시 이 문제들이 튀어나올 것이 빤하기 때문이다.
지금 여야 모두는 자신들의 정통성을 지키기 위해 물러서지 않는다. 하지만 '사초증발', '국정원 대선개입' 두 핵심사항은 이미 검찰의 손으로 넘어갔다. 검찰의 수사, 법원의 사법적 판단, 그리고 국민들의 심판이 남아있다. 그리고 최종적 판결은 내년 지방선거와 2016년 총선, 2017년 대통령선거를 통해 내려질 것이다.
350년 전 예송논쟁은 임진왜란(1592년)과 병자호란(1636년)으로 수명을 다해가던 조선이 새로운 패러다임을 창출해가는 과정이었다. 토지와 부세(賦稅) 개혁을 누가 중심이 되어서 끌어갈 것인가의 논쟁이기도 했다. 그런 치열함이 있었기에 영ㆍ정조 시대의 르네상스도 가능했다면, 필자 혼자만의 생각일까?
황태순 정치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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