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비원 XXX 퇴직인사 드립니다. 그동안 관리와 제반 일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소직을 마무리하고저 합니다. 직접 뵙고 인사를 드려야 하지만 제약된 시간이기에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 항상 건강하시고 가내가 두루 평안하시길 바랍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오늘(10일) 아침 6시 30분. 전 경비원 XXX.”
참 인사성도 밝다. 어느 아파트의 경비원이 일을 그만두면서 깍듯하게 주민들에게 남긴 인사장이다. 어제 아침에 인터넷으로 본 것이어서 더 자세한 건 모르겠지만 아마도 엘리베이터 안쪽이나 바깥에 붙여 놓았을 것이다. 주민들의 눈에 가장 잘 띄는 곳이니까.
여기서 말한 소직이란 小職, 즉 관리가 스스로를 낮추어 일컫는 말이다. 아파트 경비원이 무슨 관리냐고 따진다면 우습게 들릴 만한 말이다. 하지만 겸손하게 자기를 낮춘다는 데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면 그만이겠다.
소직 이야기를 하다 보면 1975년 2월 당시 유기춘(1922~1982) 문교부장관이 박정희 대통령의 연두순시 때 한 말이 절로 생각난다. “천학비재(淺學菲才)한 소직(小職)이 대명을 받은 지 4개월이 지났으나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해 죄송합니다. 둔마(鈍馬)와 같은 소직은 충성을 다하겠사오니 더욱 변함없이 채찍으로 계도해 주시기를 복망(伏望)합니다.”
둔마는 둔한 말, 복망은 엎드려 빈다는 뜻이다. 이때부터 그는 ‘둔마장관’이라는 명예롭지 못한 별명으로 불리게 됐다.
하여간 위에서 말한 경비원은 겸손한 사람이다. 맞춤법 틀린 곳이 있긴 하지만 글도 그만하면 잘 썼다. 왜 이런 말을 하느냐 하면 우리 아파트의 전 경비원 김씨(김씨라고 해두자)보다 훨씬 낫기 때문이다.
김씨는 무슨 말이든 자꾸 써 붙이기를 좋아했다. 주로 주민들을 계도하는 내용이다. 북 찢은 노트에 사인 펜으로 뭐라고 뭐라고 개발괴발 써서 엘리베이터 안의 거울에다 떡 붙여 놓는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그것부터 읽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런데 그가 틀리지 않은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습니다’를 옛날 맞춤법대로 ‘읍니다’로 쓰는 것 정도는 이해할 수 있지만, ‘착하게’를 ‘차카게’ 식으로 쓰곤 하니 대책이 없는 것 아닌가.
그걸 본 주민들(아마 주로 학생들이겠지)이 틀린 곳에 표시를 하고 바로잡아 놓아도 김씨는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틀린 걸 떼고 다시 써서 붙이는 일도 없다. 꿋꿋하게 또 틀린다.
그의 최고 걸작은 ‘옥상 감금’이다. 어느 날 그가 써 붙인 경고문을 읽고 나는 포복절도했다. 사진으로 찍어두지 못한 게 정말 한스럽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다. “요새 15층 옥상으로 올라가는 사람들 있는데 자꾸 그러면 않됩니다. 오늘부터 옥상을 감금할 테니 절대루 아무도 거기 올라가지 마시요. 경비원 김XX 백.”
우리 아파트는 15층인데, 옥상으로 어떻게 올라가는지 나는 모른다. 하여간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자살을 하거나 추락하는 사고가 날까 봐 김씨는 마음 졸였던가 보다. 관리사무소에서 특별 관리 지시도 했겠지. ‘않된다’는 ‘안 된다’라고 써야 맞다. 문제는 옥상 감금이다. 옥상을 폐쇄한다는 걸 그는 이렇게 쓴 건데, 나는 처음에 옥상에 올라가는 사람은 한 명도 못 내려오게 다 감금하겠다는 말인 줄 알았다.
그 뒤 옥상 폐쇄조치가 잘 됐는지 그건 모르겠지만, 우리 아파트에서 투신사고가 난 적은 없으니 그의 엄포가 잘 먹혔다고 봐야겠지. 이와 같은 명문을 수도 없이 발표해 주민들을 잘 이끌고, 나처럼 짓궂은 사람들에게 웃음을 선사하던 김씨는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걸핏하면 술을 마시고 초소에서 잠을 자다가 여러 번 걸려 결국 잘렸다는 말이 들렸다.
나는 그 사람이 잘렸다는 말을 듣고도 조금도 섭섭해 하지 않았다. 그럴 줄 알았다. 오히려 고소하게 생각한 이유가 있다. 내가 언젠가 농담 삼아 “아파트 동 대표 선거에 나가보겠다. 아파트 관리를 이렇게 해서야 되겠느냐?”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그 말을 전해들은 김씨가 “뭐요? 그 아저씨가 동 대표를 해? 푸하하하하.” 하고 목젖이 보이도록 한참 웃었다는 것이다.
만날 술 취해서 건들거리고 집도 못 찾아가는 놈이 무슨 동 대표냐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나는 7동에 사는데 술에 취해 2동에 가서 문 두드리는 걸 끌어온 일도 있는 사람이니 그런 생각을 했을 법도 하다.
그래도 그렇지. 훌륭한 인물을 그렇게 몰라보고 옥상이나 감금을 하니 안 잘리겠어? 지금은 어디서 뭘 하는지 모르지만 사람을 잘 알아보기 바란다. 나이도 많으니 이제 술도 좀 덜 드시고!
임철순 한국언론문화포럼 회장 fusedt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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