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일본에 강제 징용돼 노역에 시달리면서도 임금을 받지 못한 피해자들에게 구 일본제철의 후신인 신일본제철(현 신일철주금)이 손해를 배상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왔다.
이로써 2005년 우리 법원에 소송을 제기한 피해자들은 8년 만에 일본 기업의 배상 책임을 인정받게 됐다. 이에 따라 일제강점기에 강제 징용돼 고난을 겪은 피해자들이 잇따라 추가 소송을 제기할 가능성이 높아져 주목된다.
서울고법 민사19부(윤성근 부장판사)는 10일 여운택(90)씨 등 4명이 신일본제철 주식회사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소송의 파기환송심에서 "원고에게 각 1억원을 지급하라"며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
재판부는 "일본의 핵심 군수업체였던 구 일본제철은 일본 정부와 함께 침략 전쟁을 위해 인력을 동원하는 등 반인도적인 불법 행위를 저질렀다"며 "침략 전쟁은 국제 질서와 대한민국 헌법뿐 아니라 현재 일본 헌법에도 반하는 행위"라며 이같이 판결했다.
재판부는 특히 "신일본제철이 구 일본제철과의 동일성을 부정하거나 한일청구권협정 등을 내세워 책임이 없다고 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헌법이 수호하고자 하는 가치에 반한다"면서 "행위 불법성의 정도와 고의성, 피해 정도, 50년이 넘는 기간 책임을 부정한 태도 등과 함께 통화 가치가 변화한 점을 고려해 위자료 액수를 정했다"고 설명했다.
여씨 등은 1941~1943년 구 일본제철 담당관이 충분한 식사와 임금, 기술 습득, 귀국 후 안정적인 일자리 보장 등을 내세워 회유해 일본에 갔으나 오사카 등지에서 고된 노역에 시달리며 임금도 제대로 지급받지 못했다며 1인당 1억원의 위자료를 달라고 소송을 냈다.
앞서 원고 4명 가운데 여씨와 신천수(87)씨는 1997년 12월 신일본제철을 상대로 임금 지급과 불법 행위에 의한 손해배상을 구하는 소송을 일본 오사카지방재판소에 제기했으나 패소했고, 이 판결은 2003년 10월 최고재판소에서 확정됐다.
이후 우리 법원은 "일본의 확정 판결은 우리나라에서도 효력이 인정된다"며 일본 측 판결을 받아들였다.
그러나 대법원은 작년 5월 "일본 판결의 이유는 일제강점기 강제동원 자체를 불법이라고 보고 있는 대한민국 헌법의 핵심적 가치와 정면 충돌한다"며 "이런 판결을 그대로 승인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선량한 풍속이나 그 밖의 사회질서에 위반된다"고 원고 패소로 판결한 원심을 깨고 사건을 서울고법으로 돌려보냈었다.
이번 소송에 참여한 피해자들은 강제집행 등의 수단을 통해 배상금을 받을 수 있다. 신일본제철이 임의로 배상금을 지급하지 않더라도 원칙적으로 국내에 소유한 재산에 대해 가압류와 경매·추심 등의 절차를 거쳐 강제 집행할 수 있다. 신일본제철은 포스코 주식의 5% 가량을 보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앞으로 신일본제철 뿐 아니라 다른 전범기업들을 상대로 한 집단 소송이 잇따를 경우 절차가 좀더 복잡해질 수 있다. 후지코시 등 이미 국내 법원에 비슷한 소송이 제기된 다른 전범기업들은 대부분 국내에 재산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경우 일본 또는 제3국에 둔 재산으로 배상 받을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해당 국가 법원에서 집행 판결을 받아야 하지만 일본 법원에서 집행 판결을 받기는 사실상 불가능해 보인다. 일본 최고재판소가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이미 원고 패소로 판결을 확정했기 때문이다. 신일본제철은 일단 일본 최고재판소의 판례에 따라 한국 법원의 이번 판결을 따르지 않겠다는 입장인 것으로 알려졌다.
따라서 원고 측의 강제집행 등의 절차를 진행하는 과정에서 신일본제철 측과 또다시 다툼을 벌일 소지가 있다.
염영남기자 libert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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