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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의 즐거운 세상] 지하철의 ‘좋은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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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철순의 즐거운 세상] 지하철의 ‘좋은 말’

입력
2013.06.19 2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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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지하철 화장실은 깨끗하다. 아니 사실은 서울지하철 자체가 깨끗하다. 전체 노선망이 촘촘하여 수도권은 물론 다른 지역까지 어디든 쉽게 갈 수 있다.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처질 게 없는 시설과 시스템이다. 이렇게 우수하고 좋은 것을 매일 이용하고 있는 서울시민들만 잘 모르고 있다. 사소한 문제로도 불평 불만을 터뜨리는 사람들이 많다.

그런 서울지하철의 어느 역사 화장실에서 재미있는 글을 보았다. 지하철 7호선 기관사가 안내방송을 잘 해서 승객으로부터 선물을 받은 이야기다. 그는 여느 때처럼 “깜빡 두고 내린 물건은 무임승차 죄목으로 유실물센터에 구류되오니 잊은 물건 면회 가는 일 없도록 유의하시기 바랍니다.”라고 방송했다고 한다. 내릴 때 유의하라는 안내였다.

또 청담대교를 건널 때는 “오늘도 웃으면서 하루를 시작해 보시죠. 옆에 계신 분에게 전염될 수 있도록 미소를 지어 보시기 바랍니다. 아 참, 웃을 때 느끼한 눈빛은 삼가주십시오. 바쁜 출근시간에 자칫하면 오해 받으실 수도 있습니다.” 이렇게 멘트를 날렸다고 한다.

그런데 방송이 끝난 뒤 운전실 문을 두드리는 사람이 있어 다음 역에 정차했을 때 문을 열었다고 한다. 문 앞에 서 있던 30대 여성은 방송이 재미있었다며 핸드백을 뒤적이더니 엉뚱하게도 반창고를 주고 갔다. 감사의 표시로 뭐라도 주고 싶은데 마침 가진 게 없으니 반창고를 내밀었던 것이다.

그 기관사는 지금도 반창고를 옆자리에 놓아둔 채 근무하고 있다. 아까워서 쓰지 못하는가 보다. 그는 이 반창고를 출퇴근길에 힘들고 지친 사람들을 따뜻하게 위로해 주라는 의미로 받아들여 재미있고 멋진 말을 궁리해 내고 있다 한다. 직접 들어보지 못했지만 그의 멘트는 재미있을 것 같다. 7호선은 간간이 이용하고 있으니 언젠가 들어볼 날이 있겠지.

그런데 이런 안내방송이 촌스럽거나 생뚱맞거나 목소리가 나쁘면 하지 않느니만 못하다. 자기 딴에는 유머나 개그랍시고 하는 말이 승객들에게는 오히려 공해가 될 수 있다. 나는 그런 경험을 여러 번 했다.

서울지하철이 무슨 시베리아를 횡단하는 대륙철도라도 되는 것처럼 기관사가 장강 3만리나 무궁화 3천리 식으로 긴 여행에나 맞는 인사를 하는 경우 그날 하루가 지루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 인사 끝나기도 전에 내리는 사람도 많을 것 같다. 듣다 보면 아차, 잘못 걸렸구나 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는다.

어떤 기관사가 아주 듣기 거북한 목소리로 “연탄재 발로 차지 마라.” 어쩌구 하면서 안도현의 시 ‘너에게 묻는다’를 읊어댄 경우도 있었다. 시를 인용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앞뒤 아귀가 잘 맞지 않아서 어색하기 그지없고, 애써서 시를 망쳐놓는 것 같은 기분만 들었다. 또 어떤 사람은 귀가 멍멍 울릴 정도로 소리가 커서 듣는 사람들이 괴로울 지경이었다.

승객들을 격려하고 뭔가 좋은 말을 해주려고 하는 자세는 좋다. 그러나 안 그래도 서울지하철은 안내방송이 지나칠 만큼 많아 조용하지 못한데 기관사들의 ‘좋은 말’ 공해까지 겹치면 이용하기가 불편해진다.

일정한 수준이 되는 사람들만 좋은 말을 방송하도록 할 수 없을까? 내용은 물론 목소리까지 다 평가해서 말이다. 외국 어느 도시에서는 아무나 음악을 연주하지 못하도록 길거리의 악사들까지 오디션을 거쳐 허용한다지 않는가?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 fusedt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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