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질이 아주 나쁘다."
검찰 수사로 드러난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의 처신을 두고 나온 말이다. 김 전 청장은 경찰이 국가정보원 댓글 의혹 사건 수사에 착수하자마자 선거개입 단서를 다수 포착하고도 이를 은폐하고, 선거를 이틀여 앞두고 "댓글 흔적은 없었다"는 한밤의 기습 발표를 강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김 전 청장이 주도한 '대국민 사기극'의 전말은 이렇다.
쏟아져 나온 선거개입 증거
14일 공개된 검찰 수사결과에 따르면, 서울 수서경찰서는 지난해 12월 13일 국정원 여직원 김모씨한테서 데스크탑 컴퓨터와 노트북을 임의제출 받았다. 수서서는 서울경찰청 사이버범죄수사대 증거분석팀에 컴퓨터를 보내면서 "삭제 파일, 인터넷 히스토리, ID 및 닉네임 자료 등을 분석해달라"고 요청했다.
분석팀은 14일 경찰청 사이버 요원까지 지원받아 본격 분석에 들어갔다. 이날 오후 7시 20분쯤 증거분석 프로그램 인케이스(EnCase)를 가동해 노트북을 들여다보던 분석팀은 40여분 만에 메모장 파일 1건을 복구해냈다. ▦오늘의 유머(오유) 사이트 게시물 운영ㆍ관리 방식 ▦베스트 오브 베스트 게시판 게시물 선정 지원ㆍ저지 방법을 비롯해 30여개의 ID와 닉네임, 비밀번호 등이 적혀있었다. 인터넷에 접속해 발견된 ID와 닉네임을 검색하자 관련 ID 10개가 더 나왔다. 이 과정에서 국정원 여직원 김씨가 오유 등에 수만 번 접속했으며, IP 역추적을 피하는 방법을 검색해 본 사실도 확인됐다.
이 때부터 16일 밤 늦게까지 서울청 분석팀 소속 분석관 10여명은 퇴근도 미루고 ID 및 닉네임 40여개의 인터넷 흔적을 찾아냈다. 인터넷 분석에서는 문재인 당시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가 지난해 11월 19일 '조건없이 금강산 관광을 재개하겠다'고 밝힌 뒤 의심 ID 사용자가 오유에 "목 내놓고 금강산 가기는 싫다"는 글을 올린 사실도 확인됐다. 하드디스크에서도 '저 이번에 박근혜 찍습니다'등의 글이 발견됐다. 이러한 분석자료 출력물은 100여 페이지에 육박했고 분석관들은 "증거를 찾아냈다"며 한껏 고무됐다.
수사팀도 속인 허위발표
김 전 청장이 15일 오전부터 이 같은 상황을 모두 보고 받았다. 검찰은 김 전 청장이 "모든 분석 상황에 대한 보고는 컴퓨터에 기록이 남지 않도록 펜으로 직접 써 수기보고서를 내라"고 지시한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서울경찰청에는 "분석 결과를 절대로 수사를 맡고 있는 수서경찰서 수사팀에 넘기지 말라"는 지침이 돌았다.
이어 김 전 청장은 서울경찰청 수사부장, 수사과장, 수사2계장 등에게 "일단 분석을 좀더 진행시키면서 국가정보원 개입 의혹을 해소할 발표 방안을 강구하라"는 엉뚱한 지시를 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후 분석팀에선 증거가 계속 발견됐지만 윗선에선 정반대의 보도자료가 작성되기 시작했다. 대선 전 '디데이(D-day)'에 맞춰 "국민의 의혹을 해소해야 한다"는 명목이었다. 당초 "게시글이나 댓글을 발견하지 못했다"는 보도자료가 작성됐지만 너무 명백한 허위사실인지라 이는 이내 "(하드디스크에서) 게시글이나 댓글을 게재한 사실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수정됐다. 사실은 게재 흔적을 찾아냈지만 "하드디스크에서는 문제가 없었다"는 식으로 국민과 언론을 기만하려 든 것이다.
분석관들은 반발했다. "혐의 사실과 관련된 내용을 발견하지 못했다"고 적은 가짜 결과보고서에 서명해야 했기 때문이다. 일부 분석관들은 서명을 거부했고, 보도자료에 사실대로 적을 것을 건의했지만 묵살됐다. 100여 페이지 증거 출력물은 16일 저녁 모두 파쇄된 것으로 조사됐다.
그 사이 수서서 수사과에서는 계속 분석 자료를 보내달라는 요청이 들어왔지만, 철저히 무시됐다. 서울경찰청에서는 정작 자료는 주지도 않고 "언론에는 자료를 받았다고 하라"는 지시가 내려왔고 대선 전에 중간수사결과 발표를 해야 하니 분석 요구 키워드를 당초 100여개에서 4개로 줄이라는 지시도 거듭 된 것으로 조사됐다. 결국 분석 결과와 무관하게 기획된 허위 보도자료가 16일 오후 11시 기자단에 배포됐고, 17일 오전 "비방 댓글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거짓 기자회견이 강행됐다.
이에 대해 김 전 청장은 "무리하게 은폐 축소 지시를 한 바가 전혀 없다"며 "사이버에 대해 잘 알지도 못한다. 재판과정에서 진실이 밝혀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김혜영기자 shine@hk.co.kr
송은미기자 mys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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