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구 20여만 명의 작은 도시 화양은 개와 사람이 서로를 전염시키는 인수 공통 전염병 '빨간 눈 괴질'이 발병하며 삽시간에 아비규환 상태에 빠진다. 전염력 90%에 치사율이 50~90%나 되는 이 치명적 질병 소식에 정부는 도시를 봉쇄하고 공수부대를 투입한다. 구호단체의 손길조차 떠난 도시에서 간신히 살아 남은 자원봉사자들과 119대원들, 간호사들만이 시민을 지킨다. 고립된 도시에서 벌어지는 28일간의 이야기인 이 소설을 한 마디로 소개하면 '비극에서 비극으로'. 2011년 범죄 스릴러 으로 오랜 무명을 벗고 베스트셀러 작가가 된 정유정의 신작 장편이다.
13일 만난 작가는 "(신작 인터뷰에서) 가장 많이 받은 질문은 왜 하필 인수 공통 전염병이냐는 거였다"며 준비된 대답을 내놓았다."몇 년 전 구제역으로 수 백 만 마리의 돼지들이 생매장 당했잖아요. '동물의 죽음을 인간이 함부로 결정할 수 있는가' 하는 질문이 '사람과 개가 같은 전염병에 걸린다면 어떻게 될까?'하는 발상으로 이어졌죠."
그러나 인수 공통 전염병은 이야기를 시작하는 구실일 뿐, 핵심은 극한에 몰린 인간들의 엇갈린 행보 속에서 유추되는 복잡 다단한 욕망이다. 이 욕망들을 가깝고도 서늘하게 비추기 위해 작가는 '3인칭 다중 시점'을 통해 이야기를 전개한다. 수의사 서재형, 서재형에 앙심을 품은 박동해, 동해의 농간으로 서재형을 고발하는 기사를 쓰는 강윤주 등 화양 시민 6명이 이야기를 이끄는 인물들이다. 작가는 "6명의 플롯을 새끼줄 꼬듯 꼬아서 하나의 큰 플롯을 만든 소설이다. 각 인물이 사건(빨간 눈 괴질) 발생 후 28일간 겪는 일을 일일이 달력으로 만들면서 썼다"고 말했다.
일말의 반전이나 구원의 메시지가 없는 이 '질병 스릴러'를 계속 읽게 만드는 건 속도감 있는 전개와 촘촘한 구성이다. 작가는 3개월 만에 쓴 초고를 2년에 걸쳐 4,5차례 고쳐 톱니바퀴처럼 맞물리는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작가는"명사, 동사만으로 짧고 간단하게 쓰는 대신 정확하면서도 강렬한 동사를 쓴다. 짧은 문장은 연결하기 어렵기 때문에 조사로 문장을 연결하며 리듬을 만든다"고 말했다.
먼 발치에서 비극으로 보이는 화양시의 상황을 가까이에서 보면, 그래도 곳곳에 희망이 숨어 있다. 극한의 상황을 견디게 만드는 것은 그 시간을 함께하는 사람들에 대한 사랑이다. 지젝의 말을 빌려 다시 이 소설을 소개하면'처음에는 비극으로, 다음에는 희극으로.' 인과 응보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 각 인물들의 논리 정연하면서도 예측 가능한 행보를 제외하면, 엄지 손가락을 치켜 올려주고 싶은 소설이다.
이윤주기자 miss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