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이 원세훈(62) 전 국가정보원장을 공직선거법 및 국정원법 위반으로 불구속 기소하기로 하면서 정보기관 수장이 정치에 개입한 혐의로 법정에 서는 불행한 역사가 이어지고 있다.
원 전 원장처럼 대선과정에서 특정후보나 정당을 지지하기 위해 개입한 정보기관 수장은 '북풍 사건'을 주도한 권영해 전 국가안전기획부장을 꼽을 수 있다. 권영해 당시 안기부장은 대선을 앞둔 1997년 말 야당인사인 김대중 대통령 후보의 당선을 막기 위해 북한 당국이 김대중 후보에게 호의적이라는 내용의 오익제씨 편지를 의도적으로 공개하고 재미교포 윤홍준씨에게 김 후보를 비방하는 기자회견을 열도록 지시했다.
이듬해 3월 검찰에서 조사를 받던 권 부장은 문구용 칼로 자신의 배를 그었다. 자해소동 당시 그는 "선거에서 진 패장이니 할 말이 없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말은 권위주의 정부 시절 정보기관 수장들이 선거 개입을 핵심 임무 중 하나로 받아들이고 있었다는 방증이었다. 북풍 사건과 불법 대선자금 모금 혐의 등으로 기소된 권씨는 결국 징역 5년을 선고 받았다.
김대중 정부는 이후 안기부의 명칭을 국정원으로 바꾸면서 한때 정치 개입 차단의지를 보였지만 효과가 오래가지는 못했다. 2005년에는 '안기부 X파일' 사건 및 국가정보원 휴대폰 도청 사건과 관련해 임동원과 신건씨 등 전직 국정원장 2명이 도청을 지시하고 도청내용을 보고 받은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두 사람은 징역 3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 받았지만 특별사면 됐다. 당시 수사에서는 안기부 시절의 미림팀 도청 행각뿐만 아니라, 국정원도 여전히 정치인과 기업인을 상대로 조직적이고 광범위하게 불법 도청을 해왔던 사실이 드러났다. 막강한 정보와 권한을 갖고 있는 국정원장은 정치 개입의 유혹을 뿌리치기가 쉽지 않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명박 정부 들어서 최장수 국정원장을 지낸 원 전 원장도 이러한 유혹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인터넷 사이트에 특정후보에 유리한 게시글과 댓글 등을 올리게 해 선거에 영향을 주려고 했다는 점에서 방식만 다를 뿐 선거나 정치에 개입하려는 의도는 과거 정보기관 수장들과 큰 차이가 없다는 것이 검찰이 원 전 원장을 기소하기로 결정을 내린 배경 중 하나이다. 국정원은 댓글 작업을 종북좌파 척결 등을 위한 대북심리전의 일환으로 포장했지만 선거 개입 방식이 더욱 교묘하고 은밀해졌을 뿐이라는 게 검찰의 입장이다. 검찰 관계자는 "이번 수사를 계기로 정보기관이 나아가야 할 방향이 진지하게 논의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강철원기자 str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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