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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6월 13일] 우월감은 피해의식의 다른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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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0 세상보기/6월 13일] 우월감은 피해의식의 다른 말

입력
2013.06.12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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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불거진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 논쟁을 보면서 섬뜩한 느낌이 들었던 것은 두 가지 때문이었다. '일베'는 어떤 한 부류의 역사와 사회에 대한 지나친 왜곡을 넘어서는, 인간의 인식과 정체성이 무너진, 숨어 있던 집단'사이코패스'를 만난 느낌을 들게 한다는 것과 그들이 모두 우리의 평범한 이웃들이라는 것이다.

처음 '일베'라는 곳의 존재를 알게 된 것은 작년 대선 전, 학생들이 사용하는 말 때문이었다. 소설토론 중 한 학생이 '일베충'이란 말을 꺼냈는데, 학생들 모두가 웃었다. 필자만 무슨 말인지 알아듣지 못해 두리번거리며 그 뜻을 물었다. 당시에는 보수적인 사고를 지닌 사람을 비하하는 정도인 줄만 알았다.

알다시피 '일베'는 5ㆍ18민주화운동 비하로 세상에 널리 알려졌지만, 인터넷상에서는 제법 오랜 시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활동해온 커뮤니티이다. 학생들 사이에서 일베용어들이 유행한다는 것을 알고서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민주화, 산업화, 홍어, 운지, 로린이 등등 수많은 말이 전라도, 고 노대통령, 장애인, 심지어는 어린이를 성적으로 비하하는 말까지 재생산되어 사용되고 있었다. 일베에서 주로 활동하는 사람들이 용어들을 만들어낸 그 의도야 뚜렷했겠으나 많은 이들이 그 의도와는 상관없이 일상에 주로 사용해서, 말이 정말 말이 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실제로 몇몇 연예인들이 일베용어를 아무렇지 않게 사용해서 곤혹을 치르고 있지 않은가. 아이들에게 전해지는 파급력은 더 빠르고 무서운 일이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두려운 일은 새로 생겨나 유행하는 신종 '말'이란 것은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식을 표현한 것인데, 이들의 인식에는 어떤 사유나, 철학의 정체성이 보이지 않는 데 있다. 흔히 아는 보수논객의 대표성을 띄는 분까지도 종북주의자로 몰리는 상황을 보면 '일베'의 개념이라는 것은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특히 '일베' 안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말들에서 그들의 인식을 엿볼 수 있는데, 이들의 논리를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 단지 혐오주의에 근거한다고 보는 것이 필자만의 생각인가.

무엇이 이들을 분노하게 해서 극단적인 혐오주의를 정체성으로 받아들이게 된 것인지는 알 길 없다. 허나 분명한 것은 혐오주의라는 것은 우월감에서 비롯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실제로 '일베' 안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은 자신이 사회 '루저'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학력인증을 거친 모양이다. 허나 학력인증이라는 행위가 자신이 사회에서 패배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유일한 줄이라고 믿는다는 것이 패배감과 피해의식에 근거하는 것이 아닌가. 자신의 인격을 증명할 방법이 학력밖에 없다는 것은 너무 슬픈 일이 아니던가. 자기 모두를 드러낼 수는 없는 자신감이 없으니 숨어서 비아냥대는 꼴인데, 보수나 기득권에 대한 개념을 우월함과 착각하고 있는 모양이다. 이는 보수세력 안에서 일어나는 흔한 오류이기도 한데, 우리의 보수는 보수의 개념을 모르기도 하거니와, 그 개념도 명확하지 않다.

어쨌든 '일베' 안에 역사인식이라는 것이 존재 하는가 의심스럽지만, 정리를 하면 표면적으로 드러난 승자의 편에 같이 끼고 싶어 안달난 사람들 같다. 스스로 주종관계를 만들어 충성하는 모양새이다. 100년 전 사라진 봉건주의피해의식과 패배주의의 역사관을 보는 느낌이다. 쿠데타를 혁명으로 인식하고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하는 관점이라는 것도 정치, 역사적정체성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다. 패배감과 피해의식에 함몰된 시선은 우월하고 싶은 욕망을 낳고, 단지 욕망을 실현하기 위해 마련된 인식은 정체성이라고 보기 어렵다. '일베'에 정체성 같은 것은 애초부터 없었다는 얘기겠다. 그렇게 보면 '일베'는 그저 자신의 피해의식을 감추는 배설의 창구에 지나지 않을 지도 모를 일이다. 무엇보다 자기의 패배감과 피해의식을 배설하기 위해서 타인을 짓밟고 약자를 조롱하고 비하하는 것, 용서받을 수 없는 일이다. 영혼이 슬픈 일이다.

백가흠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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