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는 서양의 기술이 동양을 점령했던 시기였다. 중국, 동남아시아, 일본이, 서양의 기술 앞에 무릎을 꿇었다. 동남아시아의 여러 나라가 유럽의 식민지가 되었고, 한반도는 아시아의 유럽을 표방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말은 인도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는 말과 좀 다른 층위를 갖는다. 일본은 철저하게 조선의 전통을 계획적으로 말살해 나갔다. 조선의 전통을 말살했다는 것은 그것들을 하루아침에 깡그리 없애버렸다는 얘기가 아니다. 수 천 년을 이어 온 한 민족의 전통은 물리적 강제에 의해서 사탕 빼앗듯 쉽게 없앨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러나 부끄럽게 만들 수는 있다. 일본은 그들이 배운 서양의 기술과 그 가치를 가지고 우리의 말과, 의복을 비롯한 우리의 생활과 역사를 부끄러운 것으로 만들어버렸다. 그러나 그 가치 또한, 1876년 김기수의 조선수신사 일행의 행색을 보고 비웃는 일본인을 유럽인들이 비웃었듯이 어차피 남의 옷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19세기 조선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에 따라 의견이 분분하겠지만, 사실 굉장히 역동적인 시대였다는 게 내 생각이다. 전문직에 종사하는 중인계급들이 부를 축적하던 시기였고, 문화적으로도 추사와 북학파의 후인들이 발흥했던 시기였으며, 정치적으로도 노론 내부에서 자기반성이 일어나던 때였다. 이 시기에 백과전서파들이 등장했고,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수집벽이 유행했으며, 건축적으로도 재사건축이 새롭게 실험되고 있었고, 살림집에서도 새로운 모색이 막 시작되고 있었던 시기였다. 그리고 이 시도가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의해 중단되면서 조선의 문화는 이어지지 못하고 한 시대의 문을 닫는다. 혹자는 한국과 일본을 두고 전통과 완전히 단절한 한국이 일본보다 더 빠르게 근대화를 이룰 것이라고 말한 적도 있지만, 사실은 한국이 전통과 단절한 것이 아니라, 일본에 의해서 조선의 전통이 한국으로 이어지는 것을 차단 당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정확한 얘기다.
그랬기 때문에 결국 한국은 빠른 속도로 근대화 되었다. 그리고 21세기, 디자인의 시대라는 이 새로운 세기에 서양은 다시 동양으로 들어오고 있다. 그런데 전시대와는 양상이 조금 다르다. 기술은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고, 지금 아시아로 들어오는 서양의 디자인은 자신들의 시장을 개척하러 들어 온다기 보다는 새로운 아이디어를 얻기 위해 아시아를 주목하고 있다. 19세기에는 무자비한 자원수탈이 행해졌지만, 문화와 생활은 광물처럼 함부로 캐 갈 수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그 땅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이 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서양은 지금 아시아의 디자인을 주목하고 있다. 철근콘크리트라는 서양의 발명품으로 안도 다다오는 막다른 길에 접어든 모더니즘 건축의 돌파구를 제시했다. 그런가 하면 중국의 건축가 왕슈는 모더니즘과는 전혀 다른 맥락에서 중국을 현대화했다. 패션에서도 중국은 이미 중국의 스타일을 완성해 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런가 하면 일본은 일찌감치 전세계적으로 젠(Zen)스타일을 유행시켰다.
일본의 젠스타일이 서양 모더니즘의 돌파구를 제시하는 동시에 한계를 보이고 있다면, 태국의 중요한 디자인 개념인 '휴'(休)는 보다 생활에 깊이 들어 와 세계인들의 마음에 공감을 불어넣고 있다. 거기에는 마음을 다스리고, 몸을 편안히 한다는 불교적 방법이 스며있다. 태국은 불교라는 종교가 가진 몸과 마음의 철학을 디자인에 심어서 성공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에는 무엇이 있을까? 결론부터 얘기하면, 격(格)이다. 격은 사람이 겪는 '곳'에 맞는 것이고, 사람이 겪은 '때'에 맞는다는 것이다. 곳은 장소고, 자연이고, 환경이다. 때는 시간이고, 느낌이며, 상태다. 따라서 격을 갖는다는 것은 나의 바깥과 안이 조화롭다는 것이다. 조화는 계속해서 변하고, 움직인다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으면 조화는 없다.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그것이 환경과 사회에 맞는 것이 될 때 격은 이루어진다. 나는 이 '격'이 지금 한국사회가 추구해야 할 아름다운 무늬라고 말하고 싶다.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조선이 못 다한 실험을 이어 지금을 만드는 작업이라고 생각한다.
함성호 시인ㆍ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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