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려한 동대문시장과 웅장한 동대문 너머에는 서울의 전형적인 서민 동네인 창신동이 자리잡고 있다. 조선시대 때 이곳은 한성부 인창방(仁昌坊)과 숭신방(崇信坊)에 속했는데, 가운데 글자를 따서 현재의 동네 이름이 됐다.
마을 전체에 복숭아나무와 앵두나무가 심어져 있어 '붉은 열매로 맺는 나무로 둘러싸여 있다'는 뜻으로 '홍숫골' 혹은 '홍수동(紅樹洞)'으로 불리기도 했다. 경관이 수려하고 도성과 가까워 양반들의 별장이 많이 있었으며, 실학의 선구자 이수광은 이곳 바우당에서 을 집필하기도 했다. 조선 단종의 비 정순왕후는 창신동 동망봉에 올라 지아비를 그리워했다고 전해진다.
1904년에 '광장시장주식회사'가 만들어지면서 동대문시장이 열리게 된다. 일제강점기에는 이곳의 채석장 돌로 조선총독부를 비롯한 대형 석조건축물이 지어졌고, 8ㆍ15해방과 6ㆍ25전쟁 후에도 창신동은 여전히 서민들의 보금자리였다.
1970년대에는 평화시장 땅값이 오르자 그곳에 있던 봉제공장들이 대거 창신동으로 옮기면서 '의류생산의 메카'로 떠올랐다. 당시 이곳에서 살았던 일본인 노무라 모토유키는 "800여 개의 의료제조업체에서 1만5,000명이 일했고, 85%가 여성이고, 18세 이하 미성년자도 40%나 됐다. 하루 14시간 노동에 월급은 9,000원에 불과했다"고 기록했다. 지금도 창신동에는 3,000여 개의 봉제공장이 동대문 의류산업의 배후기지 역할을 하고 있다.
서울역사박물관은 다음달 21일까지 1층 기획전시실에서 'Made in 창신동'전을 열어 창신동의 어제와 오늘을 조명하면서 아련한 추억을 되새기게 하고 있다.
전시에는 500분의 1 축척으로 동대문 일대가 세밀하게 표현된 1908년 대한제국 지적도를 비롯, 1960년대 창신동 판잣집과 철거 현장을 찍은 사진작가 홍순태의 사진, 3대가 모두 창신초등학교를 졸업한 이호연씨 가족의 졸업장과 앨범, 수십 년간 봉제 일을 해 온 아주머니 등 창신동 사람들의 이야기가 육성으로 소개돼 그들의 고달프고 애잔했던 삶을 느끼게 한다.
전시실에는 한 사람이 누우면 꽉 찰듯한 '쪽방'과 햇볕이 들지 않는 봉제공장, 한 평 남짓한 도장가게, 가죽 봉제용 미싱이 설치된 구두가게 등이 실제 크기로 재현돼 있다.
창신동 골목에서 버려져 있던 자투리 원단을 재활용해 'Made in 창신동'이라는 전시제목과 창신동 지도가 제작됐다. 원단 심지(말대)와 창문, 방범창 등 철거지역 수집물로 창신동 골목길이 꾸며졌다. 버려진 재봉 받침대는 의자와 탁자로 변신했다. 정명아 박물관 전시과장은 "재활용 수집물은 서울봉제산업협회가 주축이 돼 창신동 10여 개 봉제공장에서 2달여 동안 모았다"고 말했다.
또한, 관람객들은 3m×4m짜리 3개의 대형 화면을 통해 창신동의 구불구불한 골목길을 실제로 지나가는 것처럼 체험할 수 있다.
이번 전시를 계기로 창신동도 새롭게 단장한다. 공원 정자와 골목길 평상은 주민의 의견을 수렴해 예술작품으로 거듭나고, 앞으로도 지역 커뮤니티 장소로 활용될 예정이다. 또 고 백남준 아티스트와 박수근 화백이 살았던 집터 부근에는 표지석이 설치된다.
한편 전시 기간 동안 창신동 답사 프로그램(070-7626-5782)도 운영된다. 매주 토요일 오후 2~4시에는 마을해설사들의 안내를 받아 낙산공원 입구에서 출발해 골목길을 산책할 수 있다. 월요일을 제외한 평일에는 협력 예술공간인 '000간'에서 제공하는 음성안내기를 받아 창신동을 답사할 수 있다. 관람시간 평일 오전 9시~오후 8시, 토ㆍ일ㆍ공휴일 오전 9시~오후 7시(매주 월요일 휴관), 관람료는 무료.
권대익기자 dkwon@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