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다섯 해를 살면서 처음으로 논밭을 바로 앞에 둔 집에 살게 되었다. 해미의 수연재는 원룸아파트이면서 바로 앞에 작은 개울도 흐르고 논과 밭이 맞닿아있는 묘한 동거를 이루고 있다. 이른 아침 나의 잠을 깨우는 것도 농부의 부지런한 트랙터 소리이다. 해 뜨자마자 '출근'한 부지런한 농부는 나의 가장 큰 스승이다. 그의 정직한 노동은 나의 게으름을 따끔하게 야단친다.
그런데 참 신기한 일이 생겼다. 어느 날 저녁 갑자기 요란한 개구리 소리가 들렸다. 몇 마리가 소곤소곤 울어대는 게 아니라 거대한 합창이었다. 바로 전날에도 들리지 않던 소리가 어째서 어느 한 날을 정한 듯 그렇게 갑작스럽게 들렸을까? 다음날 그 내막을 알았다. 논에 물을 댔던 까닭이다. 개구리가 간밤에 갑자기 생긴 것도 아닐 터, 신기하게도 그렇게 갑자기 울어댄 것이 서울 생활에 익숙한 내겐 작은 충격이었다. 어딘가에 조용히 숨어있던 개구리들이 논에 물을 대자 비로소 제 세상 만났다고 울어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그 녀석들의 울음소리를 듣고서야 그 존재를 깨닫고 있었다.
소리가 없다고 존재가 없는 게 아니다. 워낙 세상이 목소리 큰 작자들이 너 나 없이 나대며 설치는 통에 그 자들 아니면 세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 같지만 그게 얼마나 허세스러운 일인가. 하기야 아무리 그게 아니라고, 잘못되었다고 야단도 치고 충고도 해봐야 오불관언 자신의 판단이 절대 옳다고 우기는 이는 끝내 모를 것이다. 언젠가 논에 물을 대면 갑자기 거대한 합창이 울릴 것이라는 것을. 지금 아무 소리 없다고 자신을 묵묵히 지지하는 것이라고 착각하거나 알면서도 모른 척 하다가 작은 사단이라도 나면 와글와글 시끌시끌 울어댈 것임을 차분하게 반성해야 한다.
개구리만 갑자기 나타난 게 아니다. 여름의 반갑지 않은 손님 모기란 녀석도 나타났다. 이 녀석이 고약한 것은 낮에는 보이지 않다가 밤이 되어 불을 끄면 자객처럼 나타난다. 어둠 속에서 그 녀석이 공격하기 전에 몸이 느낄 수 있는 예후는 오로지 기분 나쁜 녀석의 소리뿐이다. 그러니 기껏해야 바짝 긴장하고 있다가 그 소리를 대충 짐작해 손바닥을 그물 삼아 날리는 것뿐이다. 그러나 그렇게 쉽게 잡힐 모기가 아니다.
개구리와 모기는 우리가 대개 소리로 그 존재를 깨닫는다는 점에서 비슷한 점을 갖고 있다. 그런데 개구리 소리는 아무리 떼를 지어 울어도 그게 잠을 방해하지는 않는데 모기는 단 한 마리만 윙윙대도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그래서 쏘아대는 모기 소리에는 견디지 못하고 약을 뿌려대지만 모기보다 사람이 먼저 그 약에 견디지 못한다. 아무리 어둠 속에 손바닥을 휘둘러도 여간해선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창 너머 들리는 개구리 소리는 정겹기까지 하다. 여행지가 아닌 내 움터 앞에서 개구리 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의 생경함은 금세 사라지고 이제는 밤의 친구가 되었다. 개구리와 모기의 소리만 그렇게 다를까? 사람의 소리도 다르다.
세상이 어수선하니 별 잡소리가 다 들린다. 아무리 표현의 자유라지만 돼먹지 않은 소리까지 마구 지껄여댄다. 인터넷이건 종편이건 도대체 예의도 지식도 없는 마구잡이 막말까지 나불댄다. 이젠 교과서까지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고치겠다고 곡필을 휘두를 기세이다. 건강한 보수라면 이 야만과 곡학을 야단치고 타일러야 할 터인데, 제 편인 줄만 알고 모른척한다. 그게 부메랑이 되어 사고의 건정성을 망치게 될 것을 경계조차 하지 않으니 모기들만 신났다. 모기는 여간해선 잡히지 않는다. 그런데 그놈들이 여름잠을 훼방한다. 한두 마리라고 넘길 존재가 아니다.
수연재에서의 첫 여름, 갑작스레 찾아온 개구리 울음소리를 듣고서야 물 가득 채운 논을 깨닫는다. 도회에서 온 객손을 제 식구처럼 받아주는 환영가로 삼는다. 그런데 불청객 모기도 나타났다. 그 고약한 녀석이 밤에 윙윙대는 통에 나는 가까스로 빠져들려던 잠에서 깬다. 이놈들을 철썩 때려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는 방법은 없을까 밤새 잠을 설치는 6월의 첫 주말이다. 개구리가 날름 모기 녀석들을 삼켜주면 좋겠다. 개구리 소리가 정겹다.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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