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화와 홍련이 그랬다. 귀신들이 죽어서 저승으로 가지 않고 이미 자신의 땅이 아닌 이곳으로 되돌아오는 것은 무언가 할 말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죽어서도 지워지지 않는 어떤 상처, 그저 잊기에는 너무 가슴 아픈 어떤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대한문, 그렇게 떠나지 못하는 20여명의 혼이 질주하는 자동차의 소음 속에서 잠들지도 못한 채 배회하는 장소다. 그 귀신과 사연을 섞었기에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들이 그 못다한 말을 전하고자 반복하여 되돌아오는 곳이다. 그 사연이 절망이 되지 않기를 기도하는 많은 사람들이 작은 연대의 손을 내미는 곳이다. 그러나 거기는 텐트를 철거함으로써 그 귀신들을 쫓을 수 있다고 믿고, 꽃으로 나무로 입을 막을 수 있다고 믿는 이들의 무참한 시도가 되풀이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곳에만 가면 어디선가 읽은 시 한 구절이 안타깝게 떠오른다. '울지 마 라고 누군가 희망의 말을 하면/ 웃기지마 하고 누군가 침을 뱉었어요'(허수경의 비행장을 떠나면서) 그렇게 내미는 희망의 손도 한이 없고, 그렇게 내뱉는 절망의 침도 끝이 없다. 그래서 더욱더 이승을 떠나지 못하는 것일 게다. 거기서 노동은, '노동하고 싶다'는 소망은 죽음과 삶이 갈라지고 절망과 희망이 충돌하는 필사적 전장이 되었다.
무산자는 무(無) 속으로, 그저 몸뚱이 하나 갖고 공허 속으로 내던져진 이들이다. 무언가 손에 쥐었는가 싶으면 어느새 비어버리는, 반복해서 무로 되돌아가는 존재다. 시지프스처럼 반복해서 되돌아오는 그 공허와 대결하는 자다. 노동이란 그 무와 대결하려는 시도일 것이다. '그래봐야 소용없다'며 허무 속으로 가라앉으려는 몸을 추슬러 '자, 다시 한 번!' 하며 일어서는 운명적인 반복의 시도다.
절망과 죽음은 아마도 그 거대한 공허 앞에서 자신의 행동이, 생존을 지속하기 위해 감수해야 하는 많은 노력과 고통이 무의미하다고 느끼게 될 때 덮쳐오는 무력감과 무기력의 산물일 것이다. 우울증은 그 무의미와 무력감 속에서 자신의 어떤 의욕이나 열의를, 프로이트라면 '리비도'라고 말했을 에너지를 더는 투여할 이유를 잃어버린 이들의 감정과 감성에서 싹트는 병이다.
쌍용차 해고자들이 다시 노동하고 싶다며 저토록 집요하게 싸우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닐까? 그들에게 노동이란 단순한 호구가 아니라, 밀쳐내도 어느새 다시 다가오는 무의미와 무력감을 웃으며 삶의 긍정으로 바꾸는 치유의 행위인 것이다. 공장으로 돌아가지 못한 해고자들이 시민의 기부를 통해 구입한 2만개의 부품으로 자동차를 만들어, 누군가 필요한 이에게 선물하겠다는 'H-20000 프로젝트' 또한 그럴 것이다. 그 프로젝트에 '마음'(Heart)의 이니셜을 붙여 H-20000이라고 명명했던 것은, 2만개의 부품을 모으는 것이나 그것을 조립하는 것 이상으로, 그런 생산의 기획을 통해 자신들의 마음이 공허를 가로질러 치유되기를 바랐기 때문이었을 것이고, 그 부품을 통해 모이는 사람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희망과 긍정의 마음으로 바꿀 수 있기를 꿈꾸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생산과 긍정의 마음으로, 절망 속에서 죽은 동료들의 혼이 다시 웃을 수 있게 되기를 소망했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마음으로 다시 만드는 자동차는 단지 하나의 물품이 아니라 그들이 자신의 삶을 향해, 아니 우리 모두를 향해 건네는 선물이다. 이는 노동하는 것마저 점점 어려워지는 이 힘겨운 세상에서, 자본가 없이도 생산할 수 있음을 상상할 수 있게 해준다. 자본관계 바깥에서 행해지는 노동을 통해, 사람들의 마음이 이제까지와 다른 방식으로 모일 수 있고 다른 형태로 조립될 수 있음을 보여줌으로써, 다른 세계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자본관계로부터 벗어날 때, 돈을 받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슬픈 인고의 행위로부터 벗어날 때, 노동은 행위 그 자체만으로 즐거운 놀이, 희망찬 치유의 몸짓이 될 수 있음을 알려준다. 그런 식으로 그들은 자신들의 고통을 방치하고 있는 세상을 위해 미래를 선물하려는 것일 게다.
이진경 연구공간 수유너머N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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