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3년 해병 부사관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가 다리를 다친 후 고향으로 돌아가던 한 젊은이는 부산 영도다리 앞에서 발을 떼지 못했다. 섬 꼭대기부터 해안가까지 빼곡히 들어찬 판잣집들, 그마저도 구하지 못해 다리 밑으로 모여든 피난민들이 쓰레기가 떠다니는 바다 옆에서 다 썩어가는 쌀 가마니를 깔고 앉아 있었다. 다리 옆 남포동 간이식당에서는 고아들이 음식쓰레기를 훔치다 들켜 주인에게 혼쭐이 나고 있었다. "아이들에게 당장 필요 한 것은 선생보다 아버지"라고 깨달은 젊은이는 다니던 사범학교를 그만두고 부산으로 피난와 있던 중앙신학대 사회복지사업과에 지원했다.
현충일을 하루 앞둔 5일, 부산 영도구의 옹달샘지역아동센터를 분주하게 돌보던 부성래(82) 박사는 사회사업가의 길에 처음 뛰어든 때를 회상했다.
부 박사는 "휴전 후 학교를 따라 서울로 올라가 처음 생활한 곳은 청계천이었다"며 "움막을 짓고 사는 아이들에게 음식을 마련해 주고 글을 가르치는 일부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한 후 인천 국립소년직업훈련소에서 일하며 전쟁 고아들을 보살피는 일들을 계속해 나갔다.
그러다 그는 유학을 떠나게 된다. "당시엔 유엔 구호물자 배분이 우리 복지정책의 전부였는데 선진국의 사례를 배우고 싶었다"는 게 이유다. 미국 플로리다주립대에서 우리나라 1호 사회사업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여러 대학에서 교수 경력을 쌓은 그는 1969년 귀국하려 했지만 거부당했다. 학생 시절 반독재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였다. 부 박사는 "민주화 이후에는 학벌로 굳어진 교수사회가 지방대 출신인 나를 받아들이는 데 인색했다"며 씁쓸해 했다.
기나긴 타국 생활을 정리하게 된 것은 2004년 부산에서 열린 한 지역복지 심포지엄에 참석해 고향 영도의 상황을 접하면서였다. 부 박사는 "영도가 부산 내 자살률 1위를 기록하고 있을 뿐 아니라 소득 차이에 따른 학교 내 왕따, 폭력 문제가 극심하다는 말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당시 미국 오클라호마주 필립스대의 일본 분교 총장으로 있던 그는 사회복지학자인 아내 마에다 미야코(50) 교수와 함께 사재를 털어 지난 2006년 옹달샘 지역아동센터를 설립했다.
부 박사는 "외국에서 얻었던 경험과 지식을 영도의 아이들을 위해 남김없이 사용하고 싶다"며 "저소득층 청소년의 배낭여행 등 문화적 혜택을 나눌 수 있는 프로그램 개발에 힘쓸 것"이라고 말했다. 부산=글ㆍ사진
조원일기자 callme11@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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