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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칼럼] 순천만에서

입력
2013.06.04 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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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립문 옆 담장 아래 양귀비꽃(개양귀비꽃)이 네댓 그루 무리 지어 피어있다. 갯내음 머금은 바람에 가녀린 꽃이 하릴없이 흔들린다. 순천만 자연생태공원에서 갈대열차를 타고 순천문학관에 내리자 만개한 양귀비꽃이 앞서서 반겨준다. 아스라이 펼쳐진 갈대평원 옆에 터 잡은 순천문학관에는 순천이 낳은 작가 정채봉(1946-2001)과 김승옥(72)의 오롯한 흔적이 있다.

이들이 누구인가. 정채봉은 성인 동화라는 독창적 장르를 개척하여 참된 삶이 무엇인지를 새로운 글쓰기로 보여주었고, 김승옥은 최초의 한글세대 작가로서 지극히 사소하고 일상적인 삶을 결코 사소하지 않게 드러내는 세련된 문체로 풀어낸 작가이다.

한국 단편문학사에서 최고의 미학적 성취를 이룬 작품으로 평가 받는 김승옥의 대표작 '무진기행'의 무대는 잘 알려진 대로 순천만이다. 1986년 5월부터 한국일보에 연재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던 기획 '문학기행'에서 순천만은 '토지'의 무대인 평사리에 이어 두 번째 답사지였다.

소설에서 무진은 '주인공이 서울에서 탈출해야 할 때거나 하여튼 무언가 새 출발이 필요할 때' 내려가는 곳이다. 김훈은 무진을 두고 '사람들의 일상성의 배후, 안개에 휩싸인 채 도사리고 있는 음험한 상상의 공간이며, 일상에 빠져듦으로써 상처를 잊으려는 사람들에게 '상처를 강요하는 이 삶이란 도대체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묻고 있는 괴로운 도시'라고 규정했다.

작가는 이 작품이 생애 중에서 가장 슬픈 시절에 쓴 것이라고 했다. 서울대 4학년 때 결혼을 약속한 여자에게 버림받은 후 고향 순천 골방에 처박혀 이 소설을 썼다는 작가. 후에 그는 '이 짧은 소설이 이야깃거리가 된다면 그것은 그 문장에 스며든 내 슬픔의 힘 때문일 것'이라고 털어놓았다. 빛나는 언어와 문학을 잉태시킨 그의 슬픔에 깊이 고개 숙인다.

왁자지껄한 주변을 둘러보니 관광객들 중 소설 속 주인공처럼 심각한 사람은 없는 것 같다. 순천국제정원박람회를 보러 왔다가 들른 가족단위의 여행객, 수학여행 온 학생, 젊은 연인들, 두루마기를 갖춰 입은 할아버지들이 나누는 얘기를 귀동냥하는 것도 또 다른 즐거움이다.

'바다로 뻗은 긴 방죽길'을 오가는 갈대열차를 타고 대대포구로 나와 갈대바다 사이에 있는 나무데크 길을 따라 걸었다. 양 옆에서 갈대가 서로의 몸을 비벼대며 내는 사각거리는 소리가 생경하다. 바람이 불 때마다 이리저리 방향을 틀며 걷는 듯한 끝없는 행렬들. 성지순례자들의 모습처럼 장엄하다. 개펄에서는 게와 짱뚱어들이 초여름의 뙤약볕을 받으며 부지런히 몸을 놀린다. 가끔씩 갈대숲에서 들리는 이름 모르는 새들의 울음소리가 이곳이 희귀한 철새도래지라는 사실과 그 안에도 은밀한 공간이 있음을 일깨운다.

순천만 일대를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용산전망대에 올랐다. 해가 떠오르고, 바람이 바다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분 지 한참이 지난 낮까지도 순천만은 엷은 안개옷을 걸치고 있다. 갈대와 칠면초 군락이 만들어낸 자연의 동심원들이 몽환적이다.

고흥반도와 여수반도가 만들어낸 둥그런 항아리 모양의 이곳이 바로 의 외서댁을 떠올리게 하는 벌교 꼬막을 살찌운 품이고, 바다나 바다에 연한 소도시를 서술하며 명징한 아름다움에 도달한 김승옥의 언어를 탄생시킨 문학의 자궁이다.

시인 곽재구가 경외의 대상으로 끌어올렸던 순천만의 노을은 보지 못했다. 그가 처음 보았을 때 개펄 위에 무릎을 꿇었다는 노을. 아쉬움을 달래며 순천을 떠나는 길목에서 양귀비를 또 만났다. 양귀비의 꽃말은 색깔별로 다르다. 흰색은 잠과 망각, 붉은 색은 위안와 몽상, 자주색은 사치와 환상이다. 아편의 원료로 쓰이는 양귀비 대신 원예용으로 심는 개양귀비는 덧없는 사랑이란다. 순결한 사랑을 꿈꾸지만 한 순간에 거품처럼 꺼지는 내용을 그린 소설의 배경 안개나루 순천과 참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최진환 문화부장 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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