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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의 이야기/6월 4일] 맛의 기록에 대한 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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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위의 이야기/6월 4일] 맛의 기록에 대한 상상

입력
2013.06.03 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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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들이 모임이었다. 다들 취기가 올라 분위기가 흥성해졌을 즈음 Y가 아껴두었던 포도주를 땄다. 좋은 술은 정신이 말짱할 때 마시는 편이 좋지만, 좋은 술을 통 크게 딸 수 있는 호기는 안타깝게도 취해 있을 때야 생기는 법. 어쨌건 맛있다, 맛있다, 우리는 깨방정을 떨며 한 병을 금세 비웠다.

잠시 후 빈 병을 몽롱한 눈으로 보며 '이런 건 무슨 맛이지?'라고 중얼거린 게 누구였는지는 정확하게 기억나지 않는다. '이제 이 세상에는 없는 맛이야'라고 재치 있게 말을 받은 건 또 누구였더라. 무슨 맛인지 알아주는 사람이 마셨으면 이 포도주는 더 기뻤을 텐데, 라고 덧붙인 건 나였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다음날 나는 토막토막 떠오르는 잡담과 어제의 맛을 되살려보려고 애쓰며 이런 생각을 했다. 소리를 기록하는 녹음기나 이미지를 기록하는 사진기처럼 맛을 기록하는 기계도 있으면 좋을 텐데. 그래서 녹미(錄味) 테이프 같은 걸 만드는 거다. 같은 음식이라도 너의 맛과 나의 맛을, 어제의 맛과 오늘의 맛을 다 다르게 담고 있는 테이프.

가령 임진왜란 때 피난 갔던 임금님이 맛본 은어의 맛. 그러면 은어가 수라상의 진수성찬에 묻혀 다시 도루묵이 될 리는 없겠지? 또 이등병 신참이 군대에서 처음 배급 받은 오리온 초코파이의 맛. 계란 입힌 밀가루소세지의 1980년대 초등학생 맛. 유년의 아버지가 처음 먹어본 흰 쌀밥과 고깃국의 맛. 그리고 어제 마신 포도주의 맛….

시인 신해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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