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가 개떡같이 말해도 내가 찰떡같이 알아들으면 서로가 좋고 문제도 없게 된다. 내가 그렇게 하면 상대도 나를 그렇게 대해줄 것이다. 가는 말이 고와야 오는 말이 고운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니까 마음 놓고 개떡같이 말하면 된다는 거냐? 그건 물론 아니다. 우리말에 ‘개’가 들어가서 좋은 건 하나도 없지만, 사실 개는 얼마나 인간에게 충실하고 정직한 동물인지 생각해 보라. 개떡은 원래 못생기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비유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그러나 먹을 것 없던 시대에 개떡은 얼마나 소중하고 맛있는 음식이었던가?
어쨌든 개떡같이 말해서 더 알기 쉽거나 재미있거나 호소력이 있었던 경우 몇 가지를 예로 들어보겠다. 고등학교 때 하숙방을 함께 썼던 회사원이 있었다. 당시로는 가장 큰 인쇄소에 다니던 기능공이었는데, 큰형처럼 나에게 잘 대해 주었고 심성이 아주 고왔다.
그런데 좀 미안한 말이지만 가방 끈이 짧은 걸 의식하고 사는 분이어서 그런지 늘 유식하게 말하려고 하는 게 문제였다. 유식한 말투의 대표적 사례는 아무데나 ‘적(的)’을 넣는 것이다. 거 왜 있잖은가? 마음적으로, 또는 마음적으루다가, 우리가 좋은 사이적으로, 생산적으로 등등.
그 중에서도 가장 히트를 친 말은 ‘동물의 감정’이다. 자기 기분을 설명할 때 그는 흔히 “인간은 동물의 감정인데 말이야...”라고 말하곤 했다.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웃음을 참기 어려웠지만 동물의 감정을 가진 사람 앞에서 웃다가 큰일 날까 봐 내색을 하지 않으려고 애쓰곤 했다. 그 대신 남들한테 그 말을 전하며 흉을 많이 보았고, 40년이 넘은 지금도 가끔 그 말을 재미있게 써먹고 있다.
그런 정신과 취지를 본받아, 그리고 동물의 감정에 전염돼서 나도 비슷한 말을 몇 번 했다. 다음은 나의 어록이다. 요즘은 덜 그렇지만 기자들은 석양주를 잘 마신다. 기사를 마감해 놓고 신문이 나오는 시간까지 짧은 시간에 술로 몸을 적시는 건데, 그때 마시는 술이 아주 맛있다. 술을 안 마신 척 입을 싹 씻고 회사에 들어가는 게 석양주의 묘미다.
그런데 후배기자 하나가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땅거미가 지면 어느새 자리를 비우고 나가 영락없이 술을 마시곤 했다. 급한 연락사항이 있는데 어디 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휴대폰도 삐삐(무선호출 신호기)도 없던 시절이었다.
찾다가 약이 올랐지만, 그가 회사에 돌아왔을 때 나는 동물의 감정을 내보이기보다 장난을 쳤다. “야, 너는 왜 음주시간에 근무를 하고 다니냐?” 그랬더니 그 녀석은 되게 미안해했다. 그 뒤로도 몇 번 그런 일이 있었는데, 지금도 그는 나를 만나면 나의 그 우스운 꾸지람이 아주 인상적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 거 하나 더 말해 볼까? 우리가 세상을 살려면 질서를 지켜야 한다. 한국인들은 올림픽이나 월드컵과 같은 큰 행사를 맞아 대대적인 ‘질서 청결 친절’ 캠페인을 벌이곤 했다. 질서는 편한 것이고 좋은 것이고 아름다운 것이다. 질서가 문란하면 안 된다. 아니, 물서가 진란하면 안 된다. 이렇게 말해야 더 효과적이고 남들이 얼른 알아듣고 두고두고 잊지 않는다. 이것이 바로 ‘동물의 감정’식 표현법이다.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 fusedt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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