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1년 11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미국을 방문했다. 앞서 그 해 5월 한국에서 5ㆍ16군사정변이 발생하자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한달 뒤 열린 국가안보회의(NSC) 회의에서 "한국에서 정권을 잡은 사람들과 관계하는 것 외에는 방안이 없다"며 박 의장을 초청했다. 케네디는 5ㆍ16 직전 한국의 급변사태를 우려해 한반도 문제를 다룰 NSC 회의를 열기로 하고 국무부에 대책이 포함된 한국 보고서를 제출토록 한 바 있다. 미국의 초청은 그처럼 한반도의 비상사태를 걱정하던 케네디가 군사정변 이후 박정희의 성향과 정책을 파악한 다음 안도했기 때문에 나온 상징적 조치였다.
케네디 대통령 도서관에 보관된 에버린 링컨(케네디의 개인비서) 소장 미공개 자료를 보면 미국 당국이 한반도 문제에 대처하는 모습들이 여느 역사책 이상으로 소상히 담겨 있다. 이들 백악관 자료 가운데 눈에 띄는 것 중 하나가 박 의장의 방미 일정표다. 그 일정표를 박근혜 대통령의 5월 방미 일정과 비교하면 많은 차이가 발견된다. 한마디로 박 의장은 실무 회담 위주, 박 대통령은 이벤트 중심의 방미로 평가할 수 있겠다. 반세기 전과 지금의 시대 상황, 한미관계, 달라진 한국의 위상이 반영된 것이겠지만 박 대통령이 박 의장보다 느슨한 워싱턴 일정을 소화했다는 게 솔직한 판단이다.
먼저 A4 용지 8쪽 분량으로 미국 국무부가 작성한 박 의장의 워싱턴 일정표를 따라가 보자. 박 의장은 1961년 11월 12일 서울을 출발해 앵커리지, 시카고를 거쳐 13일 오후 군용기로 워싱턴 공항에 도착해 부통령과 국무장관, 합참의장 등의 영접을 받았다. 다음날 알링턴 국립묘지에 헌화한 것을 시작으로 공식 일정에 들어간 박 의장은 딘 러스크 국무장관과 해외원조 담당인 파울러 해밀턴 국제개발국(AID) 국장을 국무부로 찾아가 만났다. 이어 백악관에서 케네디 대통령과 오찬 및 회담을 한 뒤 저녁에는 주미대사관 만찬과 함께 러스크 장관이 영빈관 블레어 하우스에서 주최한 만찬에 참석했다.
에버린 링컨의 자료에서는 미국 정부가 건배사로 '박정희 대통령을 위해'라고 할 것을 사전 제안하는 등 일찍부터 박 의장을 대통령으로 예우한 증거를 찾아볼 수 있다. 공식 일정 첫날 모두 9개의 행사를 소화한 박 의장은 다음날에도 오빌 프리맨 농무장관, 로버트 맥나마라 국방장관, 루터 호지스 상무장관과 잇따라 회담하고 해밀턴 AID 국장과 비공개로 2차 회담을 했다. 그날 맥나마라 장관과 오찬을 한 박 의장은 러스크 장관을 초청해 만찬 행사를 주최하기도 했다. 워싱턴 공식 일정 사흘째에는 내셔널프레스 클럽 주최 오찬에 참석해 세계 언론과 접촉하고 마지막 행사로 재미동포들을 만났다. 이처럼 워싱턴을 떠나기 전까지 3일 동안 박 의장은 17개의 꽉 짜인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거의 1시간 단위로 시간을 쪼개 써야 했다.
그로부터 52년 뒤 사상 최대의 경제사절단을 대동하고 워싱턴을 방문한 박 대통령의 일정표에는 모두 12개의 행사가 잡혔다. 그러나 워싱턴에 체류한 2박3일 동안 백악관에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정상회담 및 오찬을 한 것을 빼면 미국 정치인이나 주요 인사를 만나 실무 현안을 논의한 일정은 없었다. 각료급으로는 척 헤이글 국방장관을 한미동맹 60주년 기념 만찬에서 잠시 만난 게 전부일 정도였다. 박 대통령이 미 의회 상하원 합동회의 연설을 했지만 이는 한국 대통령으로서는 여섯번째인데다 상징적 행사라는 게 중론이다.
이런 일정들이 쉽거나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미 당국 현안을 다루는 일정이 정상회담 한 차례에 불과하고 나머지 일정은 이벤트 위주가 되다 보니 실무진들은 오히려 긴장이 덜할 수밖에 없었다.
박 대통령의 방미 기간 중 발생한 윤창중 전 청와대 대변인의 성추행 사건은 분명 그의 개인 탓이 클 것이다. 하지만 하필 워싱턴 방문 때 그런 사건이 터진 것은 수행원이 한 눈을 팔아도 표가 나지 않을 정도로 한가해 보이는 일정 때문이 아니었는지 묻고 싶다.
이태규 워싱턴특파원 tgle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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