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검찰과 감사원 등 사법기관을 총동원해 '원전 비리' 전면 재수사에 나선 까닭은 그만큼 원전 관련 기관들의 부패 사슬이 뿌리깊고 견고하다는 판단을 내렸기 때문이다. 원자력 부품 납품시스템을 밑바닥에서부터 완전히 뜯어고치는, 일종의 '극약처방'까지 필요하다고 봤다는 얘기다.
사실 지난해에도 원전업계는 비리가 드러나 대대적인 수사대상이 됐었다. 작년 11월 부품 품질검증서 위조 사건에 대한 검찰 수사결과 총 377개 품목, 1만 396개 제품이 납품된 것으로 드러났다. 감사원도 국내 납품업체 2곳이 시험성적서를 87건이나 위조해 제출했음에도 한구수력원자력이 이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감사결과를 내놓았다. 또 작년 7월엔 2008년부터 5년간 22억여원에 달하는 뇌물을 챙긴 한수원 전ㆍ현직 직원 20여명이 무더기 기소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말들이 많았고, 또 제어케이블 위조 시험성적서 파문이 터진 것이다. 불과 6개월 만에 또 다시 범정부 차원의 재조사가 시작된 이유다.
이처럼 원자력업계가 총체적 비리로 얼룩진 것은 '폐쇄성'이 짙은 구조 탓이다.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분야인 만큼, 소수의 유관기관 임직원들끼리 자리를 물려받는 인맥이 형성돼 있는 게 사실이다. 이른바 '원자력 마피아'로 불릴 정도다.
일례로 이번에 시험성적서를 위조한 기관으로 밝혀진 새한티이피의 부사장은 일종의 감리기관인 한국전력기술의 기계기술처장 출신으로 확인됐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면 새한티이피의 검사결과를 한전기술이 과연 얼마나 철저하게 따져봤을지 의문이라는 지적이 나온다. 원자력안전위원회 관계자는 "이번 사건은 제보가 없었으면 현행 검증시스템으로는 적발이 사실상 불가능했을 것"이라며 비리에 취약한 구조적 한계를 꼬집었다.
더욱이 현 검증시스템은 감리 과정이 고작 '서류 검토'만으로 수행되는 큰 허점이 있다. 한수원과 한전기술이 원전 건설을 위해 체결하는 종합설계용역 계약에는 주요 부품에 대한 실사(實査) 의무 조항이 없다.
한전기술은 기기 공급자, 곧 납품업체가 제출한 도면ㆍ자료검토ㆍ승인 등의 업무만 담당하고, 한수원은 한전기술의 검토결과를 거의 그대로 수용한다. 국내 시험ㆍ검증기관이 서류를 티 나지 않게 위조해 버리면 얼마든지 불량 부품을 납품하는 게 가능하다는 뜻이다. 서균렬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비용이 더 들고 중복이 된다 해도 반드시 제3의 검증을 누군가가 수행해야만 안전성을 담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여기에다 동일 규격, 동일 환경에서 사용할 부품에 대해선 한번 승인을 받기만 하면 계속 납품이 가능하도록 한 것도 문제다. 업계 관계자는 "한번만 납품을 따 내면 짧게는 3년, 길게는 10년 동안 걱정이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원전 부품은 수백만, 수천만 개에 달하는 만큼 일단 짓고 나면 전수 조사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한마디로 검증기관들의 '양심'에만 의존하고 있는 현 시스템으로는 원전 비리를 원천 차단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지적이다.
김정우기자 woo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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