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4일, 미국 보이스카우트연맹이 청소년 동성애자 가입을 전면 허용했다. 연맹 측은 "어떤 청소년도 성 정체성 차이로 가입이 거부돼서는 안 된다"고 밝혔다. 창설 103년 만의 일이다.
동성애자 인권의 역사는 그들이 벌여온 투쟁의 역사다. 불과 60년 전만 해도 미국에서 동성애는 불법이었고, 동성애자는 정신병원에 끌려가거나 수감되기도 했다.
최초의 성공적 동성애운동단체는 1950년 LA에서 결성된 메타친협회(Mattachine Socoety)다. 메타친은 왕에게 직언을 하는 이탈리아의 어릿광대 메타치노(Mattaccino)에서 유래한 이름. 한때 캘리포니아에서만 2,000여명의 회원이 있었지만 '사회와 대립하지 않는다(non-confrontation)'는 소극적 운동방식으로 크게 성장하진 못했다. 1961년 워싱턴DC에 메타친협회를 조직한 프랭크 카메니는 동성애자의 시민권(Civil Rights)을 주장한 최초의 운동가다. 동성애를 이유로 직장을 잃은 그는 동성애자 최초로 법원에 이의를 제기하고 백악관 앞에서 피켓 시위를 벌였다. 법원은 그의 청원을 거부했지만 동성애자들은 미국 전역에서 시민권 운동을 이어갔다.
큰 진전은 뉴욕에서 이뤄졌다. 1969년 6월 28일 새벽 뉴욕 경찰이 동성애자들의 아지트였던 그리니치 빌리지의 스톤월 인(Stonewall Inn)을 급습했다. 단속이 시작되면 흩어지기만 하던 동성애자들은 이날 동전과 화장품 등을 집어 던지며 경찰에 맞섰다. 이후 사흘 동안 2.000명의 동성애자들이 시위를 벌이며 '게이바 합법화'를 외쳤고, 미국 전역에서 동조 시위가 일어났다. 수십 년 동안 누적된 억압과 분노가 마침내 폭발한 것이다.
스톤월 항쟁을 기점으로 동성애자인권운동은 빠르게 확산됐다. 게이해방전선(GLF)이라는 '게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한 집단이 미국 주요 도시에 조직됐다. 그들은 "우리가 원하는 건 단지 기본적 권리다. 만약 이것이 폭력적이라고 한다면, 그 사람은 우리가 아니라 자유를 향한 우리의 길을 막는 사람" 이라고 외쳤다. 스톤월 항쟁 1주년이던 1970년 뉴욕 맨하탄에서 5.000여명이 참가한 집회가 열렸다. 퀴어퍼레이드는 그렇게 시작됐다.
2010년 9월 한 10대 소년이 게이라는 의심을 받고 따돌림을 받다가 자살하자, 게이 칼럼니스트 댄 세비지는 10대 성소수자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프로젝트를 시작한다. 'IT GETS BETTER'프로젝트다. 지금까지 5만명 이상의 성인 성소수자들이 고백과 응원의 영상을 웹페이지에 올렸고, 그 중에는 버락 오바마, 힐러리 클린턴, 크리스 콜퍼 등 정치인과 배우들도 있다. 이 프로젝트는 미국뿐 아니라 호주, 캐나다, 스웨덴 등 세계 각지에서 펼쳐지고 있다.
정지용기자 cdragon25@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