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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남자다운 남자란… 권력 아닌 내면의 역량을 키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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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세상]남자다운 남자란… 권력 아닌 내면의 역량을 키워라

입력
2013.05.31 12: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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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철학자 뱅상 세스페데스, 양성평등의 시대 남성성에 대한 고민관계 맺기 두려운 여성화된 남자들, '자본주의적 거세'의 산물결혼제도의 모순성에도 일침

미국의 페미니스트 소설가 에리카 종은 1973년 쓴 소설 '날기가 두렵다(Fear of Flying)'에서 흥미로운 모순 하나를 제시한다. 여성 해방을 목소리 높여 주장하던 여성 소설가가 마초 스타일의 호색한에게 홀딱 빠져든 것이다.

군림하고 억압하는 호전적 남성상은 '매력자본의 시장'에서 이미 사망 선고를 받은 지 오래다. 하지만 이 시장에서 가부장적 남성 모델이 역사의 오랜 기간 차지하고 있었던 독점적 지위를 오늘날 창궐하고 있는 '초식남'들이 대체하지는 못했다. 세상에서 가장 드센 페미니스트일지라도 무력하고 심약한, 소위 '계집애 같은' 남자들과 사랑에 빠지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요즘 같은 양성 평등의 시대, 과연 남성성이란 무엇인가.

프랑스의 현대음악 작곡자이자 철학자인 뱅상 세스페데스(42)는 에서 바로 이 고민에 천착했다. 남성성의 유래와 연혁을 살피고 새로운 정의를 탐색하면서 그는 특히 에로티즘의 측면에서 남성성을 조명한다. 그는 '남성우월주의적 의미의 '남성상 상실'은 이제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시기가 왔다. 그것은 결국 남자가 인간화된다는 의미이고, 지배해야 하는 의무나 굴레에서 벗어나 타인에 대해 더 개방적이고 더 멋진 존재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에로틱한 의미의 남성성 상실은 아주 비극적인 소식'이라고 진단한다. 이 책이 남성성에 관해 논한 수다한 책들과 다른 지점이다.

저자는 남성우위론적 야만에서의 탈출이 곧 남자의 여성화라는 왜곡에 맞서기 위해 '권력 지향적 남성성'과 '역량 지향적 남성성'을 구분한다. 그는 '남자들이 권력, 즉 명성 자체를 위한 명성, 매수할 수 있는 여자, 아첨꾼들의 알랑거림을 갈망하는 것은 무능하기 때문'이라며 '역량 있는 사람들은 원하지 않으면서도 단순히 존재함으로써 권력에 도전하는 양상을 띤다'고 말한다. 권력이 아닌 역량을 가진 남자가 '남자다운 남자'라는 것. 여기서 역량이란 개인의 내면에 존재하는 여자와 남자 사이의 보완성, 즉 양성성을 갖춘 온전한 인간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 시대의 남자들을 관계 맺기를 두려워하는 초식남으로 '거세'한 원흉으로는 흔히 페미니즘이 지목되지만, 저자는 비난의 화살을 자본주의 체제로 돌린다. 과정이 바로 목적이며, 과정 자체가 욕망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성과와 속도만을 찬미한다. 노동은 분업ㆍ반복되어 있고, 생산성에 대한 압력은 노역의 피로와 스트레스로 우리의 에로틱한 욕망을 거세한다. 성과가 보장되지 않는 유혹과 탐색의 긴 과정을 남자들은 견디지 못한다. 이른바 '자본주의적 거세'다. 인터넷의 보편화와 함께 폭발적으로 팽창한 포르노의 범람도 과정의 즐거움을 없애 버리는 자본주의 시스템의 부산물이다. 저자는 스마트폰을 우리 시대의 '스마트 남근'이라 일컫는다.

이 도발적인 젊은 철학자는 논의의 마지막 칼끝을 결혼 제도라는 배타적 짝짓기에 겨눈다. 도처에 성이 만연한 이 시대, 어느 때보다 결혼과 가정-일부일처제에 근거한 배타적 성관계-의 가치를 드높여 칭송하는 것은 자본주의의 기만적 술책이다. 소비주의의 가장 효과적인 매개 수단이 바로 핵가족이므로, 자유-연애는 안 되지만 자유-섹스는 묵인되는 역설적 상황이 벌어졌다.

배타적 성관계란 뻔뻔한 거짓말이라고 믿는 저자는 오히려 자유-성본능이 자유-연애와 연계될 때 인간은 섹스를 '사람을 역동적으로 만들고 아름답게 만드는 귀중한 기회로 여기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진실한 사랑은 제도가 강제하지 않아도 서로에 대한 책임과 정조 존중을 자연스레 발현하기 때문이다.

십분 맞는 말이다. 하지만 한때의 진실한 사랑이 초래한 '자녀'라는 사태는 어찌한단 말인가. 모두 피임을 해서 인류의 절멸을 도모해야 하는 걸까. 저자는 공동체에 의한 양육이라는 열린 가정 모델을 타락한 자본주의에 가장 큰 충격을 줄 수 있는 대안으로 제시한다. 이 대목이 수많은 철학자들을 씨줄과 날줄로 엮어가며 재기발랄하면서도 예리하게 논지를 펼쳐가던 이 책에서 독자들이 두 그룹으로 나눠지는 갈림길이 될 듯하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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