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만고만한 세 아이의 엄마이기도 한 아내는, 이제 육아에 관해서라면 거의 위로는 천문이요 아래로는 지리를 꿰뚫을 만큼 전문가가 다 된 듯싶다. 아이가 화장실에 들락거리는 횟수나 목소리의 여린 변화만으로도 그날 유치원에서 무엇을 먹었고 어떤 수업을 받았는지 훤히 알아채기도 했고, 아이의 잔기침 하나만으로도 그것이 단순한 감기인지 아니면 후두염으로까지 진행될지 대번에 예견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나는 아내 뒤에 병풍을 치고 아내 손에 부채라도 하나 쥐어주고 싶은 심정이 되기도 하는데, 이건 뭐 아이가 세 명이었기에 망정이지 네 명이었다면 아예 선지자 반열에 오르겠구나, 그런 생각을 하기도 했다. 물론 아내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아내 역시 다른 많은 초보 엄마들과 마찬가지로 열이 조금만 있어도 대뜸 병원부터 찾아가고, 장염을 앓고 있는 아이에게 괜한 반찬 투정을 한다고 야단을 치기도 했다. 그런 시행착오들이 한 해 두 해 쌓이고 쌓여 지금의 아내가 된 것인데, 곁에서 가만가만 지켜보자니 아내의 육아 비법은 역시 징후를 잘 읽어내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나의 경우를 말하자면, 아이가 괜스레 잘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집어던지면서 투정을 부리면 그저 단순히 새장난감에 대한 욕구의 발현이겠거니 생각하고 마는데, 아내는 거기에서 제 동생들에 대한 질투와 아빠에 대한 원망 같은 것을 읽어냈다. 그리고 바로 거기에서부터 다른 처방이 시작되었다. 아이들의 경우 대개 징후만 제대로 읽어내도 그에 따른 처방 역시 십중팔구 저절로 해결되기 마련인데, 그만큼 어른들에 비해 비밀도 작고 사안도 복잡하지 않고 명징한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아내는 아마 그것들을 오랫동안 관찰했기 때문에 제대로 읽어낼 수 있는 눈을 갖게 된 것이리라.
요 근래 우리 사회에 나타나고 있는 징후들은 아이들의 경우처럼 그리 간단하게 파악하고 분리하고 정리할 수 없는 것들이 대부분이다. 청와대 대변인이 정상회담 장소에서 성추행을 한 것이나, 건설업자가 별장에서 성 접대를 하고 동영상으로 기록해둔 사건, 봉사활동을 간 고등학생들이 병상에 누워 있는 할머니들에게 상식 밖의 행동을 한 사건(그걸 동영상으로 찍어 페이스북에 올린 것이 더 놀라웠다), 대낮 육사 교내에서 벌어진 성폭행 사건 등등, 우리가 이전엔 경험해보지 못했고 상상하지 못했던 징후들이 곳곳에서 폭죽처럼 발화하고 있다. 문제는 이 징후들을 다루는 우리들의 태도에 있다. 이런 사안들을 우리가 단순히 왜곡된 성 문화와 공동체의 붕괴 등과 같이 하나마나한 말들로 파악하고 손쉽게 넘어가는 순간, 모두 함께 재빠르게 욕을 하고 넘어가는 순간, 징후는 고착되고 반복되며 어느새 그저 평범한 하나의 언어가 되고 만다. 우리는 이런 징후들이 벌어질 때마다 조금 잔인할 정도로 사실에 대해서 집요하게 파고들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고선 왜 이런 일들이 벌어지는지, 이 사건들의 기저에 무엇이 있는지 도통 알 수 없게 된다. 그래서 언론의 역할이 중요한 것이다. 징후를 읽어내는 힘은 튼튼한 사실의 영역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것인데, 어찌된 일인지 요즈음은 언론은 많되 사실은 더 줄어든 느낌이다. 이것 또한 하나의 징후라면 징후랄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감기약을 먹으면 감기약이 우리 몸 안에서 어떤 작용을 하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다. 그래서 계속 반복적으로, 알지도 못한 채 감기약에 의존한다. 연애도 마찬가지다. 그 사람과의 연애가 왜 실패했는지 모르고 넘어가기 때문에, 엇비슷한 사람과 다시 만나 또 한 번 같은 일을 반복하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가면서 더 많은 징후들과 대면하게 될 것이다. 징후는 과거의 내가 현재의 나에게 보내는 일종의 메시지이다. 지나온 우리 시대가 지금의 우리 시대에게 보내는 전언이기도 하다. 그 메시지를 제대로 읽어내는 일이 필요하다. 사실의 영역이, 언론의 역할이 다른 어느 때보다 중요한 시기이다.
이기호 소설가ㆍ광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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