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대받는 열두살 소녀의 파국… 작가인 나와 소녀의 만남 포개서사 해체 형식실험 확장시켜"소설=이야기, 아니라고 믿지만 이젠 남의 말도 듣기 시작해"어른이 되어서도 잊을 수 없는 보상·상쇄되지 않을 상처 그려
한유주(31)는 '소설은 곧 이야기'라는 시중의 상식에 줄곧 항거해온 대표적인 젊은 작가다. 이 작가군에는 '전통적인 소설문법을 해체하는 파격적 형식 실험', '현실과 상상이 교묘히 녹아 드는 독특한 서사 구조', '낯설면서도 시적인 언어 체험' 따위의 설명이 늘 따라붙는다. 그러나 만들지 않고 부수기만 하는 것은 약삭빠르다. 하여 그에게 대뜸 물었다. 이야기만 아니면 새로운 소설인가? 합목적성도 없이 해체를 일삼는 것이야말로 개성을 획득하는 가장 손쉬운 방법 아닌가?
"그러게요."
뜻밖에 싱거운 대답이 돌아온다.
"세상에는 두 가지 소설이 있다고들 하잖아요. 잘 쓴 소설과 못 쓴 소설. 전 잘 쓴 소설을 쓰고 싶어요."
그는 "데뷔 후 처음 몇 년은 소설이 이야기가 아니라는 걸 보여주기 위해 서사 대신 수사로 채우려 노력했다"고 한다. 한 줄로 요약되지 않는 소설을 쓰고 싶었고, 수사는 요약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도 소설이 이야기 그 자체는 아니라고 믿고 있지만, 이젠 남의 말도 듣기 시작한 것 같아요. 허구로 사실주의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지만, 나의 방법론을 유의미하게 확장시키고는 싶어요."
스물 한 살에 문학과사회 신인문학상을 받으며 등단해 스물일곱의 나이로 한국일보문학상을 거머쥔 이 한국문단의 우량주가 마침내 첫 장편소설 (문학과지성사 발행)를 내놨다. 스스로 밝히길 "일부러 쉽게 쓰려고 노력하지는 않았지만, 나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어렵게 쓰고 싶은 마음은 없었"으며, "수없이 들어온 '도저히 못 읽겠다'는 말을 항시 머릿속에 담아 두고" 쓴 소설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되게 잘 쓰고 싶었던" 소설이다.
이제부터 작가가 제일 싫어하는 짓을 할 참이다. 줄거리 요약이다. 새 학년이 시작되는 1998년의 봄. 5학년 3반의 열 두 살짜리 소녀들이 등장한다. 주인공은 고작 12년의 생애를 통해 세계가 제게 전혀 호의적이지 않다는 것을 알아채버린, '아이'로만 명명된 무명의 소녀. 이 소녀가 겪고 있는 가정폭력은 "아이는 수색 당하는 일에, 취조 당하는 일에, 고문 당하는 일에 면역이 되어 있지만, 익숙함이 아픔을 덜어주지는 않는다. 그저 익숙하게 아플 뿐이다" 같은 문장들로 단지 암시될 뿐이다.
제게 더없이 친절했던 동급생 미아를 살해하기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의 1부는 이 시기 마땅히 누려야 할 것들을 일절 갖지 못한 '아이'가 어느 날 밤 교실에 몰래 숨어들어 급우들의 일기장에 잔인한 문장들을 써넣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일기장에 결코 자신의 일상을 기록할 수 없는 '아이'는 아이들의 순진한 문장 사이에 '나도 병아리를 죽여보고 싶다' 같은 나쁜 문장들을 끼워 넣는, 불특정다수를 향한 복수를 감행한다.
첫 장편으로 어째서 잔혹동화인가. 그는 "유년기라는 주제에 관심이 많다"고 했다. "한없이 착한 동시에 한없이 잔인할 수 있는, 인간의 다양한 본성이 극단적으로 충돌하는 시기잖아요. 세계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것이고, 슬프고 아프고 괴롭고 온갖 이상한 일들이 다 일어나죠. 돌이켜보면 내가 그 시기를 정상적으로 버틴 게 신기할 정도예요. 사람들은 어떻게 그 시기를 다 살아남았을까…." 평균치 이상의 불행을 겪었다고 생각하냐는 물음에 그는 "그렇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모두들 그렇게 말하지만."
작가는 이 잔혹동화에 소설의 화자인 '나'와 주인공인 '아이'의 만남이라는 하나의 층위를 덧씌운다. 세월이 지난 어느 날 '나'가 문학 강의를 하고 있는 교실 안으로 '아이'가 들어온다. 쓰는 자와 쓰이는 자가 얼굴을 맞대고 누가 미아를 죽였는지 따지는 판타지를 통해 작가는 허구 속의 도덕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 묻는다. 작가 스스로 처음 겪은 장편의 매력으로 꼽은 "인물이 생동해 스스로 소설 속에서 움직이는 힘"이 관철된 장면들이다.
실은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시종 현재형으로 속도감 있게 펼쳐지는 소설이 마치 카메라처럼 아무런 일도 벌어지지 않은 교실과 아이들의 모습을 하나하나 비출 때, 그 많은 일을 '아이'와 이미 겪은 독자는 불현듯 자신의 유년시절로 직행한다. 그리곤 이내 슬퍼진다.
'나의 유년기는 적당히 불행했고, 나는 적당히 불운했다. 나는 어린 시절의 불행이나 불운이, 성장한 뒤의 행복이나 행운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불행했던 아이가 자라서 행복해질 수는 있겠지만, 어른이 된 아이는 결코 과거의 불행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다.'(206쪽)
유년기를 일러 "아무리 오해하려고 노력해 봐도 아름답지는 않은 시절"(38쪽)이라고 말하는 작가는 "그때는 몰랐던 감정의 잔여물이 남아, 때만 되면 되돌아오는 것 같다"고 했다. 어린 시절은 결코 보상되지도, 상쇄되지도 않는다. 그래서 슬프고, 그래서 두렵다.
아름답고 지적인 문장으로, 문장과 문장이 빈틈없이 교호하는 서술 구조로, 그는 새롭고도 근사한 이야기의 집을 완성해냈다. 향후 어떤 방법론을 구사하든, 이 작가에 동의한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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