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지 문제가 전쟁보다 더 심각한 것은 일반 시민이 지배에 협력한다는 점입니다. 1905~1910년 일본의 정치상황은 정부에서는 최후까지 한국을 완전 식민지로 할까 보호국으로 할까 어느 정도 망설이는 상황이 있었지만 식민지로 가야 한다고 생각한 것은 실은 다수의 국민이었습니다."
일본을 대표하는 극작가이자 연출가 히라타 오리자(51ㆍ사진) 오사카대 교수는 29일 서울 대학로예술극장에서 열린 기자간담회에서 자신의 작품 '서울시민' 연작을 설명하며 이렇게 말했다. 히라타는 1909년 서울에 살았던 일본인의 일상을 그린 이 작품을 포함해 한국에서 작품이 가장 널리 알려진 일본 극작가의 한 사람이다. 그의 희곡집이 이날 처음으로 국내 번역 출간됐다. 현암사에서 나온 두 권이다. 간담회는 이 책 출간기념회와 함께 마련된 자리였다.
한국에서 '서울노트'로 번안된 '도쿄노트'는 지금까지 10개 언어로 번역돼 15개국에서 공연됐다. 그는 해외 공연을 위해 한 해의 4분의 1 정도를 일본 바깥에서 보낸다고 한다. 그의 작품이 국경을 넘어 호평 받는 것은 설정이 제3차 세계대전 이후('도쿄노트')라는 가상의 시간이거나 터키('모험왕') 말레이시아('잠 못드는 밤은 없다') 같은 전혀 일본적이지 않은 공간인데다, 현대사회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개인주의적인 인간을 다루기 때문이다. '과학하는 마음' 등 과학 연구실을 무대로 끌어들이는 참신함도 큰 몫을 한다.
20대 초반이던 1980년대 중반 한국 유학 경험이 있는 그는 특히 연극에 '한국'이라는 요소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한일 공동연극에 열심이다. "1980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때 이스탄불에 발이 묶인 일본 여행자들 이야기를 다룬 '모험왕'을 2001년 미국의 아프간 침공 때 역시 이스탄불에 발이 묶인 한국과 일본 여행자 이야기로 바꿔 '신모험왕'으로 만들자는 이야기를 연출가 박광정씨와 여러 번 해오다가 그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는 바람에 성사되지 못 했습니다." 그와 동갑이며 '서울노트' 번안 연출도 맡은 박씨와 못다 이룬 이 작품을 그는 " 내후년 한일협정 50주년 기념작으로 만들어 보고 싶다"고 말했다.
2011년 일본 대지진이 일본 문화계에 끼친 영향이 적지 않지만 그는 "너무나 큰 재해여서 그걸 어떻게 연극에 반영해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 털어놨다. 다만 에 실린 '이번 생은 참기 힘들어'의 최근 재공연 때 희곡을 수정했는데 여기에 일본 도호쿠(東北)지역 차별 문제를 추가한다거나, 연극 교육을 위해 꾸준히 그 지역을 방문하는 정도라고 설명했다. 대학 시절 만들어 이끌고 있는 극단 세이넨단(靑年團)에 대해서는 "55~60세 사이에 해체하겠다는 이야기를 해둔 상태"라며 "나이 먹어서 고집 부리는 늙은이가 되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현암사에서 '서울시민' 연작을 담은 과 '혁명일기' 'S고원으로부터' 등을 묶은 가 더 나올 예정이다.
김범수기자 bskim@hk.co.kr
사진 현암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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