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드라마 원작에선 현실적 인물 미스김은 판타지적 캐릭터 불구약자 대변해 시청자들이 감정이입대본 1회분 절반 읽고 출연 결정 탬버린 춤·빨간 내복·살사 댄스…캐릭터가 주는 힘에 능력 극대화… 주위서 '약 먹었냐' 말도 들어
야근을 권장하는 '피로사회'에서 '미스김'은 영웅 같은 존재다. 맡은 일은 완벽히 처리하되 정해진 업무 외에는 하지 않는다. '칼퇴근'은 기본이다. 회식은 '몸 버리고 간 버리고 시간 버리는 자살 테러'라며 단호히 거부한다. 비록 드라마 속이긴 하지만 사회적 약자인 계약직 사원이면서도 빈틈 없이 당당한 미스김의 등장에 잠시나마 한국사회가 환호했다. 28년차 배우 김혜수(43)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이다.
21일 종영한 KBS 드라마 '직장의 신'의 성공은 김혜수에게 큰 빚을 졌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 방송의 시청률은 14.2%(닐슨코리아 기준)에 머물렀지만 이 수치는 시청률 조사가 20, 30대 직장인들의 호응까지는 결코 탐지하지 못했다는 걸 증명해주는 듯 하다. 김혜수는 28일 기자들과 만나 활짝 웃는 표정으로 "운이 좋았다"며 "미스김을 다시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오랜만에 자신이 연기한 캐릭터에 푹 빠져본 듯한 얼굴이었다.
'직장의 신'은 2007년 일본에서 방송된 드라마 '파견의 품격'을 케이블 드라마 '꽃미남 라면가게'를 쓴 윤난중 작가가 개작한 것이다. '비정규직' '갑을 관계' '88만원 세대' 등 한국 사회 상황을 적절히 녹여낸 리메이크에 호평이 쏟아졌다.
김혜수는 연기에 대해 쏟아지는 칭찬을 윤 작가와 두 연출자 전창근 노상훈 PD의 공으로 돌렸다. "굳이 웃기려고 연기한 적도 없고, 진정성 있게 해야겠다 생각한 적도 없었어요. 직관적으로 맘껏 연기할 수 있었던 건 신뢰할 수 있는 대본이 있었기 때문이죠. 대본 상 캐릭터가 탄탄했고 훌륭한 연출자가 이를 끌어내 줬죠. 모든 스태프, 배우들이 적재적소에 있었어요. 연기자로서 자주 누리기 힘든 큰 행운이자 혜택이었죠."
시노하라 료코가 연기한 원작의 주인공과 김혜수의 미스김은 캐릭터가 조금 다르다. 평생 직장 개념이 사라지고 계약직과 프리터(아르바이트나 파트 타임 업무로 생계를 유지하는 사람)가 일반화한 요즘 일본 사회를 반영한 원작에선 주인공이 현실적으로 존재할 법한 인물이다. 하지만 한국의 '미스김'은 불가능이라고는 없는 다소 비현실적인 캐릭터다.
"현실에서 존재할 것 같지 않은 인물인데 왜 많은 시청자들이 감정이입을 했을까요. 지구를 구하는 것도 아니고 단순한 잡무밖에 하지 않는데 말이죠. 직장인이 아니라도 주위에 이런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사람이 되고 싶다 생각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김혜수는 대본 1회분을 절반쯤 읽었을 때 출연을 결정했다고 한다. "내가 열광하는 영화는 흥행이 잘 안 될 정도로 작품을 고르는 감이 떨어진다"고 했지만, 이번엔 그의 감이 정확히 맞아 떨어진 거다. 그는 "오랜만에 드라마에 출연하는데 바쁜 일정을 어떻게 소화할까, 하는 생각이 하나도 안 들 정도로 대본이 기막히게 좋았고, 민감하고 심각한 소재이지만 너무도 참신하고 신선해서 출연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고 말했다.
현란한 탬버린 춤과 살사 댄스를 선보이고, 빨간 내복을 입은 채 묘기에 가까운 스트레칭을 해내는 등 몸을 사리지 않는 연기는 매번 화제였다. 탬버린 장면만 6시간 찍다가 팔목에 상처를 입기도 했고 유도 장면을 찍다가 어깨가 빠지는 일도 있었지만 "캐릭터가 주는 힘 덕분에 능력 이상의 것을 해낼 수 있었다"고 말했다.
그는 "첫 방송이 나간 뒤 아는 사람들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쏟아졌다"며 "나와 같이 일해본 사람들마저 '네가 이렇게 연기할 줄은 몰랐다' '약 먹었냐' '내가 아는 김혜수가 아니다'라고 말했다"며 웃었다. 정작 자신의 연기에 대해선 겸손하달까 냉정했다. "저의 작은 장점이 캐릭터와 잘 맞아 떨어져 극대화돼 보인 겁니다. 견고하게 완성된 캐릭터 위에 저를 덧입혔을 뿐이에요."
김혜수는 '직장의 신' 방송 직전 논문 표절 사실이 밝혀져 구설에 올랐다. 그는 "어릴 때부터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해 단지 학교 다니는 게 좋아 대학원을 다녔던 것일 뿐 학위를 위해서 다녔던 건 아니었다"며 "잘못한 건 잘못한 것이니 변명할 필요가 없었고 드라마와 학교, 교수님께 폐가 되는 것 같아 죄송했다"고 말했다.
하반기에 영화 '관상'으로 다시 대중과 만나는 김혜수는 '직장의 신' 연기가 배우로서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됐다고 말했다. "배우도 계약직이지만 보편적 계약직과는 다르죠. 배우라는 직업이 선망의 대상이지만 사실 기본적인 생계를 잇기 힘든 사람이 더 많아요. 감사하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죠. 그래서 주어진 환경에서 엄살 떨지 말고 최선을 다해야겠다는 생각을 늘 하지만 늘 또 까먹어버리거든요. 그런데 이번 드라마를 하고 나니까 다시는 그걸 까먹지 않을 것 같아요."
고경석기자 kave@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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