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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사재기, 작가의 책임은 없는가

입력
2013.05.28 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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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자음과모음)가 자신의 소설 를 사재기한 것에 대한 심경을 소설가 황석영씨는 이렇게 표현했다. "초등학교 때도 재수가 없어 화장실 청소당번에 잘 걸렸다. 이번에도 오물이 튀었다." 재수없게도 부도덕한(더러운) 출판사에 잘못 걸려들어 불명예(오물)까지 뒤집어썼다는 얘기다. 그렇지만 "이왕 이렇게 된 것 청소 깨끗이 하고, 텃밭 일궈서 씨앗 뿌리겠다"고 했다. 이번 사건을 출판계의 사재기 악습을 근절하는 계기로 삼겠다며 검찰 수사, 처벌 강화, 출판계 자정운동을 촉구했다.

어제는 민음사의 '큰 손'이 출판계를 놀라게 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신작소설 의 국내 판권에 자그마치 16여억 원을 주었다. 물론 사상 최고액이다. 전작 도 비슷했지만 한 권이 아니라 세 권이었다. 그뿐이 아니다. 이 소설을 잡기 위해 오래 전부터 문학사상사가 란 제목으로 출판해온 그의 대표작 (원제)의 판권까지 2억 원이나 주고 다시 사는 선심공세까지 펼쳤다.

사재기와 판권. 이 둘은 뗄래야 뗄 수가 없다. 계약금 형식의'선(先)인세'라는 족쇄로 단단히 묶여있다. 우리 출판계의 고질적 병폐, 구조적 양극화와 투기성 체질도 모두 여기에서 출발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선인세는 말 그대로 작가에게 미리 주는 인세로 문학, 특히 소설 분야에 관행이 됐다. 인기 작가일수록 예외가 없으며, 그 액수 또한 많게는 몇 억 원까지 커지는 것은 당연하다. 황석영씨 역시 출판사로부터 의 선인세를 받았다. 하루키에게 주는 16억원도 선인세다.

작가로서는 이보다 좋은 일은 없다. 미리 받은 인세만큼의 책이 안 팔려도 그만이고, 더 팔리면 또 그만큼의 인세 수입을 올릴 수 있으니 '꿩 먹고 알 먹고'다. 그러나 책이 얼마나 팔릴지 모르는 출판사로서는 모험이다. 하루키의 새 소설의 경우 미리 준 인세가 100만 권에 해당된다. 저절로 그만큼 팔리면 다행이지만, 아니면 사재기를 해서라도 베스트셀러를 만들려는 유혹에 빠진다.

출판계에 선인세가 유행하기 시작한 것은 문학시장의 진입장벽이 높아진 1990년대 후반이다. 소위 명망 있는 문학출판사들이 신인 발굴을 포기하는 대신 인기작가를 독점하고, 작가들 역시 이름 있는 출판사를 선호하자 군소출판사들이 앞다투어 '베팅'에 나선 것이다. 물론 모든 인기작가들이 선인세의 유혹에 빠진 것은 아니다. 출판사와의 의리와 작가로서의 자존심을 지킨 사람들도 있었다.

작가들도 알고 있다. 자신이 받은 과도한 선인세가 결국 출판시장을 왜곡하고, 문학적 토양까지 척박하게 만드는 부메랑이 된다는 사실을. "출판사의 사재기는 이해가 안 된다. 그냥 두어도 팔릴 책인데"라는 말이 조금은 무책임하게 들리는 이유다. 하루키에게 의 선인세 15억 원을 주고는 "작가가 돈만 본 것이 아니다. 권위 있는 출판사를 찾았다"는 자화자찬과 사대주의적 변명도 구차하기는 마찬가지다.

출판계야말로 하루키의 소설 제목처럼'상실의 시대'에 빠져 있다. 한쪽에서는 온라인서점이 상도덕을 저버리고 온갖 편법할인으로 도서정가제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다른 한쪽에서는 출판사가 최소한의 양심까지 팽개친 채 교묘한 사재기로 베스트셀러를 조작해 독자들까지 속이고 있다. 물론 가장 큰 책임은 책을 지식산업이 아닌 '도박'으로 생각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영세출판사들, 자본을 앞세워 작가와 시장을 독식하려는 유명출판사들에 있다.

그렇다면 작가들은 아무런 책임이 없는 것인가. 출판사들을 탓하기에 앞서 자존심이란 말을 빌어 은근히 과도한 선인세를 탐하지는 안 했는지, 그 때문에 무의식적으로라도 출판사가 자신의 책을 사재기하는 것을 알고도 모른 척하지는 않았는지 한번쯤 되돌아 볼 일이다. 극심한 불황으로 초판이 곧 절판이 되는 시대에 인기작가야말로 요즘 논란이 되고 있는 출판계의 '갑'이 아닌가.

이대현 논설위원 leed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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