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CC건설이 레미콘 납품업체들을 상대로 단가 후려치기를 시도했다가 거센 반발에 부딪쳐 단가 인하 요구를 철회한 사실이 확인됐다. '을(乙)의 단결'이 '갑(甲)의 횡포'를 잠재운 셈이다. 우월적 지위를 활용한 갑의 횡포가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가운데 건설업계에도 중소 하청업체 및 납품업체 대상의 불공정거래 행위가 만연해 있다는 지적이다.
23일 건설업계에 따르면 지난달 말 KCC건설은 경기 동탄2기신도시 공사 현장에 레미콘을 납품하는 업체들에게 판매단가표의 97%로 발행하던 세금계산서를 차기 물량 납품을 조건으로 89%로 대폭 낮춰 발행해달라고 요구했다. 레미콘 업체들은 세금계산서를 발행해야 매출이 발생하는 데, 결국 납품대금을 9%나 후려친 것이다. KCC건설은 지난해 1조5,154억원의 매출을 기록한 시공능력 24위의 중견 건설사다.
건설회사에 대해 을(乙)의 입장인 레미콘 업체들은 그간 관행적으로 이뤄져 온 단가 후려치기를 참고 넘어갔지만, 이번 KCC건설의 요구는 너무 무리하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이달 3일부터 동탄2기신도시 내 KCC건설 사업장에 대한 레미콘 납품을 거부했다. 한 레미콘 업체 관계자는 "주택경기 침체로 레미콘 수요가 준데다 원자재와 물류비 상승으로 경영여건이 악화한 상황에서 납품단가마저 대폭 깎겠다고 하니, 그 동안 쌓였던 불만이 일시에 폭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약자인 레미콘 업체들이 갑을 상대로 반란을 일으킨 셈이다.
KCC건설 측은 예상치 못한 을의 반발에 크게 당황했다. 사태가 확산될 조짐을 보이자 KCC건설은 슬며시 꼬리를 내렸다. 동탄2기신도시 현장소장이 레미콘 업체들과 협의를 갖고 납품단가 인하 요구를 철회한 것이다. 레미콘업계 관계자는 "KCC건설의 단가 후려치기가 너무 심했다는 공감대가 형성되면서 자연스럽게 납품 거부로 이어졌다"면서 "이번에는 KCC가 한발 물러섰지만, 언제 또 무리한 요구를 해올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이번에는 갑이 물러섰지만, 언제 역공을 취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큰 것이다. 이 때문인지 정작 피해를 입은 레미콘 업체들이 을의 반란 사실을 함구하고 있어 정확한 피해 업체 수와 피해 규모조차 확인되지 않고 있다. 갑인 건설사에 밉보이면 회사 문을 닫을 정도로 철저한 보복을 당할 수 있어서다. KCC건설 측은 "레미콘 업체들과 개별적인 협의를 거쳐 단가를 정했지만,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해 없던 일로 하기로 했다"고 해명했다.
레미콘 업체에 대한 건설사들의 단가 후려치기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관행적으로 이뤄지고 있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전언이다. 건설사들이 연말이나 공사가 완료될 시점이면 차기 물량 납품을 조건으로 공공연하게 납품대금 인하를 레미콘 업체들에 요구한다는 것이다. 레미콘업계 관계자는 "재벌계열 대형 건설사를 비롯해 상당수 건설사들이 판매단가표의 97%로 세금계산서를 발행해야 하지만, 실제로는 여기서 1~5%를 더 낮출 것을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부와 건설ㆍ레미콘업계 3자는 지난해 3월 건설사의 단가 후려치기를 막기 위해 납품대금 기준을 판매단가표의 97%로 합의한 바 있다.
배성재기자 passion@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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