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바닥에 드러누워서라도 지게차, 삼발이(개조 오토바이)들을 틀어막고 싶은 심정이요."
서울 중구 필동 주민 배남규(75)씨는 20일 오전 집 앞 골목에서 마주친 지게차를 보고 거칠게 말을 내뱉었다. 그가 말하는 와중에도 폭 5m 남짓한 도로 양 쪽으로 빽빽이 들어선 인쇄소 앞에서는 차량들이 종이 등 자재를 쉴새 없이 나르고 있었다. 배씨는 최근 인쇄기계에 대한 소음ㆍ진동 법규정이 완화돼 더 이상 필동 인쇄소들을 단속할 방법이 없어질 상황이란 소식을 듣고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는 "필동에만 50년 째 사는 데 근 5년 새에 '남산공단'이 돼 버렸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남산 한옥마을과 이웃한 필동 부근에 인쇄소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2008년 무렵. 을지로 일대 인쇄업소들은 경기불황을 겪으면서 상대적으로 지가가 싸면서도 관련 업체들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필동 일대로 대거 이주했다. 2003년 2,518개였던 을지로 일대 인쇄소 중 약 450군데가 폐업신고를 했으며 이 가운데 300여 개가 필동 주택가로 옮겨와 사실상의 '공단'을 형성한 상황이다.
인쇄소로 인한 소음ㆍ공해ㆍ분진 등 필동 주민들의 민원이 끊이지 않는 가운데 최근 환경부가 인쇄기계 관련 법 개정을 추진하면서 갈등이 고조되고 있다.
환경부가 지난 2월 '인쇄기계의 성능 향상으로 장비가 대형화 됐어도 소음수치는 과거보다 늘지 않았는데 출력 50마력 미만으로 한정 짓는 현 기준은 비현실적'이라는 인쇄업자들의 건의를 받아 들여 100마력 미만으로 완화하는 내용의 개정안을 마련, 법제처에 검토를 의뢰했다.
필동 주민들이 관련 법 개정을 극구 반대하는 것은 '(인쇄소 입지가) 소음 기준 이외 다른 부분은 문제되지 않는다'는 중구청의 판단 때문이다. 이에 따라 주민들 사이에서는 '소음규정마저 완화 될 경우 인쇄소 확산을 더 이상 막을 수 없다'는 위기감이 조성되기 시작한 것이다.
일반주거지역으로 구분된 필동 인근에 다수의 인쇄공장이 들어설 때까지 중구청이 단속을 나가지 않은 점도 논란이 되고 있다. 중구청 관계자는 "면적 500㎡ 미만, 소음ㆍ진동 배출시설(인쇄기기) 출력 50마력 미만 등으로 제한하고 있는 건축법상 일반주거지역 내 입주 가능한 근린생활시설 기준에서 벗어난 40여 개의 인쇄소에 지난 2011년 말 단속 안내장을 발송했다"면서도 "인쇄업자들이 규정 적용에 문제가 있다며 이의를 제기해 와 환경부 답변이 올 때까지 단속을 보류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1년이 지나 환경부의 답변을 받은 후 중구청은 5월 중 전수조사를 거쳐 위반 업소를 단속하겠다고 주민들에게 약속했지만 마찬가지로 인쇄업자들의 반발에 부딪혀 유야무야 되고 있는 실정이다.
유병호 필동주민비상대책위원회 부회장은 "주민들 사이에서 인쇄업자들과 중구청 사이에 거래가 있는 게 아니냐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 정도"라며 "법 개정안을 철회하고 필동 일대에 종합적인 환경조사를 거친 후 위반업소들은 철저히 단속해야 한다"고 말했다.
반면 필동에서 인쇄업체를 운영하고 있는 박장선(49)씨는 "세수의 큰 부분을 차지하는 업체들이 중구를 떠나길 원치 않았던 중구청이 주거 지역인 필동으로 이전을 유도해 공장등록까지 내 줬다"며 "일부 주민들의 민원만 듣고 수십 년 전에 만들어진 법으로 단속하겠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원일기자 callme11@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