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월간지로부터 짧은 산문을 청탁 받았다. 분량은 원고지 7매. 글을 마무리하고 문서통계로 확인해 보니 8매 정도가 나왔다. 이 정도 넘친 것쯤은 상관없겠지 싶어 그냥 원고를 넘겼다. 한 달 후 책이 집에 도착했다. 내 글이 실린 페이지를 펴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내가 이렇게 썼나? 첫 단락은 통째로 날아갔고 군데군데 삭제된 문장이 허다했다. 단어도 문장구조도 멋대로 바뀌어 있었다. 잘려나간 부분이 애초 원고의 삼분의 일이었다. 부아가 치밀었다. 사람을 뭘로 보는 거야. 남의 글을 이렇게 만신창이로 가위질해 놓고 뻔뻔하게 연락 한 번 안 해? 따질 요량으로 출판사 전화번호를 누르려는 순간, 이번에는 불쾌감 대신 자괴감이 몰려왔다. 편집자로 일하는 친구가 필자들을 성토하던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개판인 원고가 한둘이 아니야. 기획에 어울리지 않는 뚱딴지 소리에, 비문투성이에, 맞춤법도 엉망. 그러면서도 대단한 작가라도 되는 양 한 글자도 고치면 안 된다며 고집을 부려. 어쩌자는 건지 원." 어쩌면 내 글도, 그렇게 보였던 건 아닐까. 알맹이 없는 말을 너절하게 늘어놓은 글. '문체'랍시고 '비문'을 남발하는 글. 그랬던 걸까. 한 뜸을 들이고 편집자와 통화를 했다. 글을 고치거나 줄여야 한다고 생각되시면, 부디 필자와 먼저 상의해주셨으면 합니다…. 내 목소리에는 불쾌감과 자괴감이 반반쯤 섞이며 착잡함으로 중화된 감정이 깃들어 있었을 것이다.
시인 신해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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