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와 유럽연합(EU)이 은행계좌 정보를 교환하는 내용의 조세조약 개정 협상을 하기로 합의했다고 파이낸셜타임스(FT)가 20일 보도했다. 예금주 신원을 비밀에 부쳐온 스위스 은행권이 EU 회원국 국민의 역외자산 내역을 공개하겠다는 의미다. 협상 결과에 따라 공개 범위가 달라지겠지만 스위스 정부가 1934년 은행법을 개정한 뒤 고수해온 은행 비밀주의 원칙이 80년 만에 종언을 고하게 됐다는 관측이 우세하다.
EU는 현재 회원국 및 주변국을 상대로 계좌정보 자동교환 법제화를 추진하고 있다. 해외 금융자산을 보유한 국민을 파악해 세금을 걷기 위한 조치로, 지난달 영국령 조세피난처 버진아일랜드에서 재산은닉 혐의자 명단이 대거 유출된 사건이 계기가 됐다. EU는 27개 회원국 중 계좌정보 자동교환을 거부해온 오스트리아와 룩셈부르크를 압박하는 한편 스위스, 리히텐슈타인, 산마리노, 안도라, 모나코 등 조세피난처로 유명한 5개 비회원국과도 조세조약 개정을 추진해왔다. 이 가운데 2조8,000억달러(3,127조원) 규모의 막대한 외국인 자산을 운용하는 스위스는 핵심 타깃이었다.
스위스 비밀계좌의 명성이 결정적 타격을 입은 것은 2009년 스위스 최대은행 UBS가 미국 정부의 압력에 굴복, 탈세 혐의가 있는 미국인 예금주 4,450명의 정보를 넘기면서부터다. 스위스는 이후 독일, 영국, 한국 등과 조세조약 협상에 나서 계좌 비공개 권한을 보장받는 대신 과세에 협력하기로 합의하며 선제 대응했지만 올해 2월 미국과 사실상 미국인 계좌정보를 자동 제공하는 협정을 맺고 굴복했다. 유럽 자금이 스위스 비밀계좌의 절대적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에 스위스가 EU와 계좌정보 자동교환에 합의한다면 은행 비밀주의 원칙은 사실상 철폐된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