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한미동맹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60주년의 근거는 한미동맹의 실체라 할 수 있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이 지금부터 60년 전인 1953년 10월 1일에 체결되었기 때문이다. 이 조약이 가조인되던 8월 8일 덜레스 미 국무부장관은 "이 조약은 우리 청년들의 피로 봉인되었다"며 조약의 역사적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그 다음날 이승만 대통령도 "오늘날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이 성립된 것은 1882년 조미통상조약 이후로 우리나라 독립 역사상에 가장 긴중(緊重)한 진전이다. 이제 한미 방위조약이 체결되었으므로 우리의 후손들이 앞으로 누대에 걸쳐 이 조약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혜택을 누릴 것이다."라고 선언함으로써 이 조약을 군사동맹 이상의 다중 가치를 지닌 획기적 조약으로 평가했다.
이승만의 예언대로 대한민국이 오늘날의 빛나는 성취를 이룩하는 데 한미상호방위조약이 굳건한 초석이 되었다는 것은 일부 반미주의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동의할 것이다. 그렇다면 한미상호방위조약은 누구의 구상에 의해서 어떻게 맺어지게 된 것일까? 비록 한미상호방위조약이 1953년에 맺어졌다 할지라도 그 연원은 매우 깊은 것이었고 그 중심에는 바로 초대 대통령 이승만 자신이 있었다.
첫째, 이승만은 이미 구한말 시기에 미국과의 연미(聯美)정책을 구상하고 있었다. 1904년 옥중에서 집필한 자신의 저서 에서 미국을 자유 평등 민주주의에 기초한 이상적 기독교 국가로 보고 '상등문명국' 이라고 찬양하고 흠모했다. 또한 이 책의 결론에서 개방의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여기에서 개방이란 중국이나 러시아와 같은 대륙세력이 아니라 미국과 같은 해양세력과 손을 잡는 것을 의미했다.
둘째, 그러나 이승만이 연미정책을 추구했다고 해서 미국을 전적으로 믿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는 1905년 8월 4일 대한제국 최후의 특사로 미국의 시어도어 루즈벨트 대통령을 방문해 대한제국의 독립보존을 위한 미국의 거중조정을 요청한 바 있었지만 성공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바로 닷새 전에 이미 태프트-가쓰라 밀약이 맺어졌기 때문이었다. 이승만은 1943년 5월 15일 미국의 프랭클린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편지를 보내 "이제야말로 미국이 지난 36년 동안 한국 민중과 한국에 행한 잘못과 부정을 바로잡을 때"라고 항의했다. 또한 1945년 4월 9일 자신의 측근인 올리버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한국 사람들은 1905년 자기들을 일본의 멍에를 지도록 몰아넣은 미국 정치가들의 배신 행위에 분개하고 있다"고 자신의 분한 마음을 토로하기도 했다.
셋째, 미국을 믿을 수 없었던 이승만은 정부 수립 이후 미국에게 한국의 안보를 문서상으로 보증해 달라고 요구했지만 미국은 소극적이었다. 1948년 8월 신생 대한민국이 탄생하자 이승만은 미국에게 상호방위조약의 체결 가능성을 타진하였지만 무초 주한 미대사는 "미국은 토머스 제퍼슨 대통령 시대 이래 어느 국가와도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일이 없다"고 응수했다. 1949년 6월 주한미군이 철수한 이후에도 이승만은 한미 간의 상호방위협정 체결을 요청하였지만 미국은 '상호방위원조협정' 및 '주한미군사고문단설치협정' 등 실익 없는 협정을 맺어주는 데 그쳤다.
마지막으로, 미국은 한국전쟁이 일어난 이후에도 상호방위조약 체결에 소극적이었다. 미국은 조약의 체결 대신 16개 유엔 참전국들 명의로 '확대제재선언'을 공포하고, 한국군을 20개 사단으로 증강시켜 주는 것으로 무마하려 하였다. 그러나 한국전 종결을 공약으로 내세웠던 아이젠하워는 이승만이 1953년 6월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회심의 카드로 휴전협정 체결에 찬물을 끼얹자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맺어 주지 않을 수 없었다. 이승만은 당시 로버트슨 특사에게 한국은 미국에게 1910년의 한일합병, 1945년의 분단으로 두 번씩이나 배반당했다면서 미국을 압박했고 이 압박은 결국 주효했다. 실로 이승만은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의 알파요 오메가였다.
이철순 부산대 정치외교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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