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첫날 칼럼에 흔한 덕담 대신 윤창중 얘기를 했다. 박근혜 당선인이 하필이면 말과 글과 처신이 그토록 편벽되고 기이한 인물을 대변인으로 고른 것이 꺼림칙하다고 썼다. 언론계 안팎의 평판을 외면한 선택이 걱정스러웠다.
지난 칼럼을 새삼 들먹인 건, 숱한 언론과 자칭 정치평론가들이 저마다 예지력을 자랑한 것에 뒤늦게 가담하려는 뜻이 아니다. 윤창중이 마침내 일을 내자 기다렸다는 듯 분별없이 떠든 언론의 행태를 비판하면, 이내 그와 대통령을 편든다고 욕할 게 뻔해서다. 그의 됨됨이와 행로에는 애초 큰 관심이 없다. 드물게 품격 있는 대통령, 외교 무대에서 더 돋보인 여성 대통령과 나라의 품격이 손상된 게 안타까울 뿐이다.
윤창중의 황당한 성추행 범죄를 개탄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우리 언론은 보수와 진보, 주류와 대안 언론을 가림 없이 천박한 선정주의, 센세이셔널리즘 충동을 억누르지 못했다. 언론 자신과 나라의 품격은 올바로 돌보지 않은 채 선정성에 휘둘렸다. 대선 전 윤창중을 띄운 보수신문들의 종편 방송이 인터넷 유사 언론이 무색한 선정적 보도와 논평을 밤낮없이 쏟아낸 것은 특히 아이러니다.
무엇보다 언론이 '은폐와 도주' 논란에 몰두한 것이 진정으로 국격을 염려한 때문일까. 피해 인턴과 가까운 한국문화원 여직원이 사건을 경찰에 신고하고, 누군가 인터넷에 "사건이 덮이지 않도록 도와 달라"고 호소한 것은 순수한 정의감일 것이다. 그러나 이미 경찰에 신고된 사건을 숨기기 위해 윤창중을 몰래 빼돌렸다고 무작정 비난하는 것은 여러모로 사리에 어긋난다.
그 상황에서 대통령 수행단이 달리 어떤 조치를 해야 옳은 선택이었을까. 다른 나라라면 경찰의 출두 명령이나 체포영장도 없는 상황에서 대통령 대변인을 곧장 경찰에 자진 출두하게 했을까. 그렇게 세상에 알리는 것이 국격을 위한 선택일까. 또 미국 경찰이 그를 체포하거나 도주를 막을 생각이었다면, 공항을 빠져나가도록 그냥 두었을까. 미국은 그리 허술한 나라가 아니다.
미 국무부는 외교(관) 면책특권 관련 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경찰 등 사법기관과 24시간 핫라인을 운영한다. 윤창중은 외교관은 아니지만 최고위 외교사절인 대통령의 측근 수행원이었다. 경찰은 면책특권 인정 여부를 국무부에 확인했을 것이고, 국무부는 잠정적이나마 면책특권을 인정하고 우리 대사관에도 알렸을 법하다. 윤창중의 '나 홀로' 귀국에는 그런 외교 관행 또는 배려가 얽혔을 것이다.
윤창중을 서둘러 귀국시키지 않았다면 어찌 됐을까. 국격을 훼손한 파렴치범을 나라의 상징인 대통령 전용기로 빼돌렸다고 더욱 거세게 비난했을 것이다. 이런 사리를 제대로 헤아린다면, 미국 경찰과 국무부보다 앞서 '자진 출두'에 '범죄자 인도'까지 논하는 것은 거친 정의감으로 보기에도 어색하다.
물론 대통령 수행단과 청와대의 대응에는 '늑장보고' 등 허술한 구석이 많다. 대통령도 애초 책임이 크다. 그러나 언론의 선정적 행태는 고유한 비판 기능의 틀을 크게 벗어난다. 어떻게든 상처와 흠집을 키우려는 적대적 진보 언론과 평소 보수 주류의 품격을 자랑스레 내세우는 언론이 함께 선정주의에 몰두하는 모습은 우리 언론의 천박한 수준을 그대로 드러냈다. 인터넷 유사 언론과 별 차이가 없을 만치 쉽게 품격을 저버리는 언론이 대통령과 나라의 품격을 걱정하는 건 우습고도 한심하다.
세계 최악의 '황색언론 천국'으로 불리는 영국 사회가 안팎으로 품격을 유지하는 것은 최고 권위의 주류 언론이 꿋꿋이 버티기 때문이다. 좌우 이념의 권위지들이 진지하고 치열하게 논쟁하는 풍토에서 잠시 일탈하려는 국민의 심리가 황색 언론의 터전이라는 분석도 있다. 좌우로 선정적 언론에 포위된 우리 국민은 아예 언론을 외면하지 않을까 걱정스럽다. 지루한 윤창중 사건을 굳이 되새기는 이유다.
논설고문 btka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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