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력(西曆),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태어난 해를 기원으로 삼는 서양 책력은 오늘날 전 세계에서 통용되고 있다. 예수가 탄생하기 전은 BC(before Christ), 예수가 탄생한 해부터는 AD(Anno Domini, 우리 주님의 해)라고 한다. 오늘날에는 BCE(before the common era)와 CE(common era, 서기)가 쓰인다. 서력기원 2013년이면 'the year 2013 of the Christian era'라고 쓴다.
뜬금없이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은 최근 들은 온라인 강의에서 BC라는 말이 예수와 관계없는 다른 의미도로도 쓰이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음악계에도 BC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게 한 가지가 아니라고 한다.
스페인 출신의 첼리스트 파블로 카잘스(1876~1973)를 이야기하는 그 강의에서 BC는 'before Casals'다. 첼로연주자는 카잘스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는 것이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모음곡 악보를 13세 때 발견한 카잘스는 12년 동안 피나는 연습을 한 뒤에야 이 곡을 대중 앞에서 연주했다.
바흐는 카잘스에 의해 새로 태어나게 됐다. 연주는 물론 프랑코 독재에 대한 항거만으로도 카잘스는 존경 받을 만하다. 이 경우의 BC는 첼리스트 카잘스의 위대함을 알려주는 말이다.
테너에도 BC가 있다. 'before Caruso'다. 이탈리아 출신인 엔리코 카루소(1873~1921)는
신화적인 성악가였다. 뛰어난 테너가 나올 때마다 사람들은 “카루소가 다시 태어났다." 고 말하곤 했다.
그는 무리한 공연과 과로로 50세도 못 돼 사망했다. 그가 좀 더 살았더라면 녹음과 음반 제작기술의 발달에 힘입어 더 많은 음반을 남겼을 거라고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는 테너의 대명사였다.
소프라노에도 BC가 있다. 'before Calas'다. 그리스계 이민자의 딸로 미국에서 태어난 마리아 칼라스(1923~1977)는 최고의 소프라노였다. 그를 평가한 글을 축약해 옮기면 '음과 언어와의 상호 관계의 의미를 철저하게 파헤쳐 음악 속에 숨겨진 드라마와 감정과 성격을 최대한으로 끌어냈다. 그 목소리는 콜로라투라 소프라노의 가볍고 섬세한 음색에서 드라마틱 소프라노의 극적인 힘참, 메조소프라노의 어슴푸레한 울림까지 상식적으로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폭넓은 표현력을 가졌다.'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
음악에서는 그렇다 치고 다른 분야에는 BC가 없을까? 영화계에도 BC가 있을 법하다. 'before Chaplin'이다. 찰리 채플린(1889~1977)은 가장 위대한 무성영화 배우, 감독이자 스튜디오의 수장, 작곡가로 영화 제작의 모든 영역에서 최고의 능력을 발휘했던 사람이다. 그의 수많은 영화는 코미디뿐만 아니라 영화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하다. 찰리 채플린은 영화를 진정한 예술로 끌어올린 존경할 만한 아티스트였다.
또 뭐 없나? 다른 분야의 BC는 더 생각나지 않는다. 이름이 C로 시작되는 시인 소설가나 문화예술인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before'를 앞에 붙여도 좋을 만큼 압도적이고 신화적인 인물은 떠오르지 않는다. 어느 한 개인에 의해 세상과 시대와 예술이 획기적으로 달라지는 일도 이제는 거의 없는 것 같다.
어차피 그렇다면 이걸 내 이름에 한번 붙여 보면 어떨까? 'before Chul Soon'. 으음, 일단 그럴 듯하다. 발음에도 어색한 게 전혀 없다. 그런데 철순이 이 세상에 태어나 활동하기 이전과 그 이후에 달라진 게 뭐지? 아무리 생각해봐도 들이댈 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세계인구가 하나 더 늘었나? 아들을 둘 낳았으니 임(任)씨 확산 전파에 조금이나마 기여했나?
생각해보니 참 거시기하다. 'before Chul Soon'이라는 말을 지어낸 것 자체가 언어도단 어불성설 언감생심이다. BC는 인터넷 채팅에서 무능력자(Basket Case), 기능이 마비됐다는 뜻으로도 쓰인다는데, 요즘 날씨가 너무 더워 내가 잠시 어떻게 됐던 것 같다. BC가 아니라 AC구나. AC!
임철순 한국일보 논설고문 fusedtree@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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