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10월 서강대 경제학과 교수였던 남덕우는 청와대로부터 뜻 밖의 통보를 받았다. 재무부장관을 맡아달라는 얘기였다.
그는 사실 박정희정부와는 아무런 연고가 없었다. 5ㆍ16 주역도 아니고, 군이나 관료 출신도 아니었다. 오히려 제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67~71년) 평가단 회의에서 정부를 향해 ‘쓴 소리’를 아까지 않았던 그였다.
하지만 이런 소신발언이 오히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의 관심을 끌었던 모양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그에 임명장을 주면서 “남 교수, 그 동안 정부가 하는 일에 비판을 많이 하던데, 이제 맛 좀 봐”라고 말했다.
산업화의 시대로 일컬어지는 1970년대는 확실히 남덕우의 시대였다. 재무부장관 5년(1969~74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 4년(74~78년) 등 총 9년 동안 그는 한국 경제를 이끌었다. 사채동결조치(긴급금융조치), 부가가치세 도입, 수출 100억 달러 달성 및 1인당 국민소득 1,000달러 돌파(77년) 등 한국 경제에 획을 그은 70년대의 굵직한 사건들은 모두 그의 손에서 비롯됐다. 경제정책에 관한 한 그는 박정희대통령의 분신이었고, ‘한강의 기적을 만든 주역’이란 별칭이 따라 다녔다.
후배 경제관료들은 ‘역대 최고의 경제사령탑’으로 그를 꼽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5공 출범 후 국무총리를 역임했지만, 그에겐 언제나 ‘경제부총리’란 호칭이 더 어울렸다.
관료 생활을 마친 뒤에도 그는 한국무역협회장(83~90년) 재임기간 동안 서울 삼성동 무역센터 건립을 주도하며 무역입국의 초석을 다졌다. 국제비즈니스센터(IBC)포럼 이사장과 한국 선진화포럼 이사장 등으로 최근까지도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특히 경제부총리 재임시절 ‘퍼스트 레이디’였던 박근혜 대통령과는 뗄 수 없는 인연으로, 지난 해 대통령 선거에서도 그는 원로조언그룹으로도 활동했다.
공만 있는 건 아니다. 한국경제의 성장기를 이끌었던 최고의 경제사령탑임은 분명하지만, 고도압축 성장형 경제정책의 문제점이 지적될 때면 그에 대한 비판론도 어김없이 제기되는 게 사실이다. 한 경제관료는 “남덕우 전 총리와 함께 고도성장시대의 한 페이지가 사라지게 됐다”고 말했다.
그 역시 스스로에 대해선 “주위 환경과 타협하는 정부 관료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2009년 회고록 에서 남 전 총리는 “돌이켜 보면 나는 성공한 정책가도 아니고 성공한 경제학자도 아니었다. 다만 박정희 대통령의 강력한 정책 의지를 시장경제 이론의 틀 안에서 소화하려고 안간힘을 다한 것은 사실이다”고 말했다.
19일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에 마련된 그의 빈소에는 추모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한덕수 무역협회 회장은 “장관과 부총리 시절 국제 수지가 나쁜 상황에서 국내 경기를 살려야 한다며 주말마다 허허벌판이었던 잠실 건설현장에 나가시던 모습이 기억난다”고 추모했다. 이용만 전 재무부 장관도 “경제개발 정책을 펼 때 일주일에 서너 번씩 밤을 새우면서 일을 한 뒤 국무회의에서 대통령에게 보고를 했다”며 그를 회상했다.
전경련도 이날 논평을 내고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널리 알리려고 노력한 ‘영원한 현역’”이라고 추모했다. 박근혜 대통령과 이명박 전 대통령, 정홍원 국무총리, 현오석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등도 조화를 보내 애도의 뜻을 표했다.
김정우기자 woo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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