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세기 '책 사냥꾼' 포조 고대 로마 루크레티우스가 쓴 '사물의 본성에 관하여' 발견다빈치·갈릴레오·다윈 등 어떻게, 어떤 영향 미쳤는지 히스토리 픽션으로 묘사
"점점 어두워져가는 수도원 도서관에서 수도원장과 사서의 경계심 어린 눈초리를 받으며, 포조는 책의 서두를 읽는 것 이상의 여유는 없었을 수도 있다. 그는 데리고 온 보조 필사가에게 시를 베끼도록 지시하면서 이 어두운 도서관으로부터 그것을 해방시키기 위한 움직임을 서둘렀다. 그것은 머지않아 그가 살고 있는 세계 전체를 해체하는 데에 기여하게 될 운명의 책이었다."(66쪽)
서양의 15세기 초는 혼란의 시대로 기록된다. 혼란이란, 세계사의 커다란 매듭이 으레 그렇듯, 묵은 것이 무너지고 새 것이 솟는 순간의 역동을 의미한다. 인간의 의지가 신의 오랜 속박으로부터 벗어나는 이 즈음의 역동을 르네상스라 일컫는다. 사상, 문학, 미술, 건축 등에 걸쳐 폭발적으로, 인간은 신의 섭리에 짓눌려 있던 스스로의 자유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이 거대한 전환의 기폭(起爆)에 대한 설은 분분하다. 1417년 독일 헤센주 깊숙한 곳에 있는 수도원의 먼지 쌓인 서가에서 한 권의 낡은 책이 전직 교황의 비서에게 발견됐다는 사실, 은 그것을 르네상스 발화의 불꽃으로 그려내는 흥미진진한 책이다.
추리소설을 연상케 하는 도입부의 인물 묘사와 주변부부터 조금씩 어둠을 지워가며 배경을 드러내는 기법 덕에 이 책은 역사에서 뼈대를 발라내 상상의 살을 붙인 히스토리 픽션으로 읽힌다. 다시 말해 꽤 재미있다. 하지만 책에 실린 역사와 그것을 바탕으로 삼은 추론은 모두 객관적 서술로 분류돼야 옳다. 권말에 실린 32쪽에 달하는 주석과 수백권의 참고문헌 목록이 이 책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하버드대 교수인 지은이 스티븐 그린블랫은 셰익스피어 연구의 권위자다. 이 책에서 그는 기원전 4세기의 에피쿠로스와 기원전 1세기의 루크레티우스, 그리고 15세기의 포조 브라촐리니의 불가사의한 사상적 만남을 추적, 르네상스의 태동과 전개를 세련된 필치로 묘사하고 있다. 2011년 전미국도서상과 2012년 퓰리처상의 논픽션 부분 수상작이다.
책의 얼개는 이탈리아의 '책 사냥꾼' 포조가 독일 수도원에서 루크레티우스의 라는 서사시를 찾아내 유포하는 과정이다. 포조는 교황의 명령을 우아한 라틴어 문장에 담아 유럽대륙 전역에 뿌리던 문서 담당 비서였다. 권력의 지밀(至密)에 있었기에 부와 권세를 누렸다. 그러나 그의 주인 요한네스 23세 교황은 1415년, 대륙의 권력 투쟁에서 패배해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졸지에 일자리를 잃은 포조는, 장기인 라틴어 감식안을 살려 책 사냥꾼이 된다. 약 80년 전 시인 페트라르카가 로마 시대 역사가 리비우스의 기념비적 저작 을 비롯해 키케로, 프로페르티우스 등 고대의 걸작을 발견해 집대성한 이래, 묻혀 있는 고전을 찾아내는 일이 지식인들 사이에서 붐이었다. 당시 이들을 지칭하는 용어가 책 사냥꾼이었다.
책 사냥의 세계에 발을 들인 포조는 이미 털릴 만큼 털린 이탈리아를 떠나 알프스 산맥을 넘는다. 스위스와 독일의 수도원을 뒤지고 다니던 그는 웨자강 상류 풀다 수도원의 곰팡내 나는 도서관에서 루크레티우스의 를 찾아낸다. 그리고 1,450년 저쪽의 로마, "교황청의 부패와 각종 음모, 정치적 쇠락, 그리고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선(腺)페스트에 시름하던" 로마가 아니라 "아직 광장과 원로원이 당당하게 서 있던 시절의 로마, 잃어버린 세계에 대한 경탄과 열망을 불어넣던 보석같이 아름다운 라틴어가 넘실대던 고대의 로마"를 발견한다. 장시(長詩)의 형식을 취한 이 책 속엔 당시로서는 위험한 생각_우주는 신의 도움 없이도 움직이고, 사후세계에 경험하게 된다는 종교적 공포는 인간생활의 적이며, 쾌락과 미덕은 대립적인 것이 아니라 서로 뒤엉켜 있다는 사실_이 가득 담겨 있었다. 이처럼 포조와 루크레티우스의 시대를 초월한 만남에 대한 묘사가 이 책 의 전반부다. 그리고 후반부에서, 낡은 책 한 권이 바꿔놓은 완전히 다른 세상의 모습을 보여준다.
루크레티우스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은 에피쿠로스의 원자론이다. 원자론은 지금껏 존재한 모든 것과 앞으로 존재할 모든 것이 파괴할 수 없는 입자로 만들어진 것이며, 그것은 더 이상 작아질 수 없을 만큼 작으며, 그 수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많다는 사상이다. 에피쿠로스는 인간이나 물가의 날벌레, 해와 달도 모두 원자로 구성된다고 봤다. 핵심은 원자 간에는 어떤 위계질서도 없고 신성한 존재나 신의 지시도 없다는 것. 삼라만상을 원자로 환원하고 신에 대한 두려움을 제거하려는 시도_그 큰 줄기는 후에 과학으로 입증되지만_는 지옥의 무시무시한 형벌이나 기독교 교리의 압박에 억눌려 있던 15세기 유럽인들에게 새로운 복음으로 충분했다. 이 책은 가 어떻게 보티첼리와 다 빈치의 예술에 영향을 주고 갈릴레오와 몽테뉴가 대담한 생각을 갖게 했는지, 훗날 프로이트와 다윈, 아인슈타인, 토머스 제퍼슨에게 지침이 됐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한다.
지은이는 서문에 책의 내용과는 다소 동떨어진, 어린 시절 그를 숨막히게 한 죽음에 대한 상념을 털어 놓는다. 그리고 대학시절 영역판 를 접한 뒤의 소감을 "이 땅에 머무는 시간을 죽음에 대한 공포에 사로잡힌 채 보내는 것은 그야말로 멍청한 짓이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것은 신이나 다른 그 무엇의 권위에도 기대지 않고 스스로의 이성으로 만물의 본성에 접근하라는 루크레티우스의 목소리가 르네상스인들을, 그리고 2,000년의 시간을 뛰어넘어 지은이를 각성케 한 휴머니즘의 힘일 것이다.
유상호기자 shy@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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