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16일 협박이나 폭행에 의한 부부간 성관계에 대해 강간죄를 적용, 실형을 선고한 것은 부인은 남편의 성관계 요구에 따라야 한다는 전통적인 혼인과 성(性)에 대한 사회 인식의 변화를 반영한 것이다.
이번 판결에서 쟁점은 '폭력 협박을 동원해 부녀(婦女)를 간음했을 때' 성립하는 강간 범죄에 배우자, 즉 부인(妻)이 포함되느냐였다. 여성의 인권 보호를 주장하는 측에서는 당연히 포함된다는 입장이지만, 반대 주장 역시 만만치 않았다. 지난 4월 대법원이 이번 사건에 대한 공개 변론을 열었을 당시 피고인 측 대리인은 "생물학적으로 사람은 동물에 포함되지만 문리적으로는 사람을 동물이라고 하지 않는다"며 "가족 관계에서 아빠 역시 부인이나 딸을 여자로 보지 않는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법원 역시 그 동안 부부 강간죄는 인정하지 않았다. 개인의 사생활 영역인 부부간 갈등과 내밀한 문제에 대해 국가가 개입하는 것은 부적절하다는 이유에서였다. 대법원은 이런 논리로 '실질적인 부부관계가 유지되고 있을 때에는 설령 남편이 강제로 아내를 간음했더라도 강간죄가 성립하지 않는다'는 판례를 지난 1970년 이후 43년 동안 유지해왔다.
2009년 부부 간에 강간죄를 인정해 유죄를 선고한 판결이 두 차례 있었지만, 이미 두 사람이 이혼에 합의했거나 별거를 하는 등 사실상 부부라고 볼 수 없었다는 점에서 지금까지 부부 강간을 부인해 온 입장에는 변화가 없었다.
하지만 대법원은 이날 '부인(妻) 역시 형법이 강간죄로부터 보호하고 있는 대상'이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다. 부부라는 사적인 특성보다는 여성으로서 가지는 성적 자기 결정권을 보장해야 하기 때문에, 폭력이나 협박에 따른 원치 않은 성관계를 가질 의무가 없다는 결론을 내린 것이다.
재판부는 특히 "아내에 대한 성폭력은 매우 사적이고 은밀한 성격을 띠고 있어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여성의 피해는 점차 심각해질 수 있다"며 "국가가 부부 사이의 내밀한 성생활이라는 이유만으로 개입을 자제한다면 개인의 존엄과 양성의 평등에 기초한 혼인생활을 보장할 국가 책무를 소홀히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번 판결에 따라 법조계에서는 그 동안 정확한 통계가 집계되지 않을 정도로 은밀한 영역이었던 부부 강간 사건이 대폭 늘어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부부 강간의 처벌이 인정됨에 따라 이혼 소송의 사유로만 제시됐던 '남편에 의한 폭력과 강제 성관계' 문제에 경찰이나 검찰이 개입하는 상황이 가능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이혼 소송을 앞두고 재산 분할 등에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부부 강간 혐의를 악용하는 사례 등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나오고 있다. 한 중견 변호사는 "사적 공간인 '침실'에서 벌어진 일의 사실 관계를 정확하게 밝히기가 쉽지 않다는 점에서 무고한 피해자가 발생할 수 있다"고 말했다.
남상욱기자 thot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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