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14일 간첩 혐의로 체포된 미국 외교관에게 추방 명령을 내렸다. 양국 정부가 이번 사건에 큰 비중을 두지 않고 상황 수습에 나선 가운데 미국 언론들은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으로 알려진 이 외교관의 어설픈 행적을 들어 러시아가 고의로 사건을 키워 폭로했다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러시아 연방보안국(FSB)은 모스크바 주재 미국대사관의 3등 서기관 라이언 크리스토퍼 포글을 이날 새벽 체포했다고 밝혔다. 포글은 러시아 남부 캅카스 지역의 테러방지 임무를 담당하는 러시아 관료를 정보원으로 포섭하려 한 혐의를 받고 있다. 이슬람 반군 조직의 근거지인 캅카스는 지난달 발생한 보스턴 폭탄테러 용의자 형제의 연고지로 주목받았다. 외교관 면책특권이 있는 포글은 잠시 구금됐다가 미국대사관에 인계됐고 러시아 외무부는 마이클 맥폴 미국 대사를 불러 포글을 페르소나 논 그라타(외교상 기피 인물)로 지정했다는 사실을 알리고 조속한 귀국을 요구했다.
FSB는 포글을 체포ㆍ구금하는 장면이 담긴 5분 분량의 동영상을 국영TV를 통해 공개했다. 간첩 혐의를 적발할 경우 조용히 협의 처리해온 양국의 관례에 비춰볼 때 이례적 조치다. 포글이 체포 당시 쓰고 있던 금발 가발을 비롯해 현금, 나침반, 모스크바 시내 지도, 신분증, 지령문 등 소지품도 동영상에 공개됐다.
뉴욕타임스(NYT)는 러시아 정보기관에 정통한 현지 전문가들을 인용해 “1970년대도 아니고 이런 구닥다리 방식으로 간첩활동을 했다면 정말 어리석은 짓”이라고 전했다. 전문가들은 중대한 임무를 띤 스파이라면 자기 정체가 드러날 신분증을 소지할 리가 없고 포섭 대상에게 전하려 했다는 지령문도 일반인이 아는 구글 이메일 계정 개설 방법을 설명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며 “러시아 당국이 기획한 함정수사일 가능성이 있다”고 NYT에 말했다. 마크 갈레오티 뉴욕대 교수는 “러시아 정부가 국내정치적 의도에서 폭로했을 수 있다”고 분석했다. 반정부 세력 확대에 직면한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미국이 간첩 활동을 통해 내정에 간섭하고 있다는 의심을 퍼뜨리려 했다는 것이다.
러시아가 미국 외교관을 추방하는 것은 거의 10년 만이다. 러시아는 그러나 “냉전 시절에나 있을 법한 도발적 행위로, 양국의 상호 신뢰 강화에 도움이 안될 것”이라는 외무부 성명 외에는 비난을 자제하고 있다. 이달 초 존 케리 미 국무장관의 러시아 방문으로 조성된 화해 분위기를 깨지 않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미국 국무부도 “양국은 모든 사안에서 폭넓고 깊은 관계를 맺고 있으며 협력 관계는 계속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날 양국 외교장관은 스웨덴에서 회담을 갖고 시리아 내전 문제 등을 논의했다.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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