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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나름나름의 가족, 그 오래된 농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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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산책] 나름나름의 가족, 그 오래된 농담

입력
2013.05.10 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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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선생이 가신 지도 어느덧 두어 해가 지났다. 생전에 자주는 아니더라도 이런저런 일로 가끔씩 얼굴을 뵐 기회가 없지는 않았는데, 돌아가시고 나니 그런 기쁨조차 맛볼 수 없게 됐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힘이 나는 어른을 잃은 아쉬움이 참으로 크다.

선생의 소설 가운데 이라는 장편이 있다. 나는 이 소설이 참 좋다. 때때로 이 소설을 꺼내놓고 아무 대목이나 펼쳐서 그 부분부터 읽기 시작한다. 그러면 언제나 예외 없이 다시 이 소설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 이 마력은 무엇일까?

좋아하는 대상을 두고 분석을 하기는 좀 민망한 일이지만 그것은 아마도 이 소설에 나오는 가족들의 이야기 때문일 것이다. 이 소설에는 의사 심영빈의 가족을 중심으로 그의 여동생인 심영묘의 시댁과 심영빈의 초등학교 동창인 현금의 가족 등 다양한 형태의 가족들이 나온다.

심영빈은 홀어머니 밑에서 성장한 전형적인 자수성가형 중산층이다. 그의 여동생 영묘의 시댁은 재벌가 송회장네다. 이 구도만으로도 이미 흥미진진한데 여기에 여자 동창 현금의 가족 이야기가 덧붙여진다. 사업가 아버지와 돈 쓰는 것 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는 엄마 밑에서 자란 철부지 인생 현금은 비슷한 부류의 남자와 결혼을 하고 역시 비슷한 인생을 살다가 어느 날 문득 돈에 대한 회의를 발견한다.

영빈의 가정이 사랑과 연민이라는 중산층의 도덕감각으로 무장하고 있다면, 송회장네는 체면과 허식으로 가득 찬 아집 그 자체다. 재벌 소리를 듣는 이 부잣집 송회장은 자신의 아들 송경호가 암에 걸리자 그 사실을 숨기고 수술을 권유하는 사돈 심영빈의 처사를 나무란다. 그리고 자신이 알고 있는 온갖 민간요법만 시행, 결국 아들을 죽게 만든다. 어느 누구도 이 비이성적 처사에 항거하지 못한다. 돈으로 이루어진 송회장의 권력에 도전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중산층 영빈의 가정이라고 문제가 없는 게 아니다. 겉으로는 화목하고 따뜻해 보이는 이 가정은 실상 영빈의 외도와 홀시어머니의 아들에 대한 집착으로 안에서부터 곪아 들어간다. 교사인 그의 아내는 아들을 낳기 위해 번번이 태아성별을 확인한 후 딸일 경우 낙태수술을 감행한다. 이것이 과학과 지성의 신봉자로 그려지는 중산층의 현주소다.

제 각각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가정도 완전하지 않다. 물질만능주의와 비이성적인 아집, 그리고 중산층의 속물의식 등 이 열어 보이고 있는 우리 이웃집들의 실상은 생각보다 심각하다. 하긴, 일찍이 톨스토이도 이 비슷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그의 의 첫 대목은 이렇게 시작한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가정은 나름나름으로 불행하다”.

흥미로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완서 선생은 가족의 해체를 주장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다. 선생 역시 오늘 우리의 가족이 어떤 지경에 이르고 있는지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이 노련한 소설가는 그런 줄 알면서도 속는 것, 그것이 가족이라고 말한다. 가족이란 가짜인 줄 알면서도 그것을 부인하면 살아갈 최후의 근거를 잃는 것, 아주 오래된 농담과도 같은 것이라는 게 박완서 선생의 통찰이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다면 갖다 버리고 싶은 것이 가족이다”라는 일본 감독 기타노 다케시의 위악도 그럴 듯하지만 가족이란 ‘아주 오래된 농담’이라는 박완서 선생의 혜안도 멋지다. 기타노 다케시의 말이 가족에 대한 우리의 혐오 본능을 통쾌하게 해소시켜준다면 박완서 선생의 이야기는 그 절망으로부터 우리를 건져 올리고 위안을 준다. 선생은 말한다. 몰랐나, 가족이란, 아니 인간이란 그런 존재라는 걸. 그런 줄 알면서도 속아주는 것이 진짜 가족이다. 가족이란 농담 같은 것이다. 그것도 아주 오래된.

가정의 달 오월, 새삼, 선생이 그립다.

신수정 문학평론가ㆍ 명지대문예창작학과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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