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쌍의 젊은 전문직 부부들이 서로의 자녀들을 돌봐주는 육아협동조합을 만들었다. 조합 규칙은 간단하고 공평하다. 조합에 가입하면 20장의 쿠폰이 지급되는데 쿠폰 한 장으로 30분의 탁아서비스가 가능하며, 자신의 아이를 돌봐준 동료 회원에게 맡긴 시간만큼 지급하면 된다. 이런 식으로 여유 시간에 동료의 아이를 돌봐주고 모은 쿠폰을 필요할 때 자녀를 맡기면서 사용하는 것이다. 그런데 잘 굴러가던 협동조합에 어느 날 심각한 문제가 발생했다. 오랫동안 집을 비울 때를 대비해 쿠폰을 가능한 많이 모아두려는 사람들이 늘어났고 결국 쿠폰을 구하기 어려워지자 사람들은 점점 더 쿠폰 모으기에 열중하는 악순환에 빠진 것이다.
이미 알아챈 독자들도 있겠지만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폴 크루그먼 미 프린스턴대 교수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장기 침체를 설명하기 위해 여러 번 거론한 사례다. 이 문제에 대한 경제학적 해법은 쿠폰을 더 많이 발행하는 것이다. 쿠폰이 늘어나 구하기 쉬워지면 쿠폰을 절약하려는 욕구가 완화되고 그래서 다시 쿠폰이 활발하게 유통되는 선순환으로 바뀔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렇게 해서 육아협동조합은 다시 잘 돌아갔다. 현재의 장기 침체를 해결할 원칙도 바로 쿠폰, 즉 돈을 더 찍어내는 것에서 출발한다는 것이 크루그먼의 주장이다.
9일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도 이런 경제학적 해법에 따라 기준금리를 0.25%포인트 인하했다. 정부와 일부 언론의 거센 금리 인하 압박을 외면하고 금리를 동결했던 4월과 다른 결정을 내린 것이다. 기준금리로 늘어나게 될 통화량과 곧 시행될 정부의 추가경정예산 집행이 맞물리면 우리 경제에도 '쿠폰'이 늘어나게 된다. 이제 경기회복만 기다리면 되는 것일까.
지난 4월 정기 금통위 회의에서 일부 금통위원들이 '금리인하 무용론'을 제기하며 지적된 문제들을 살펴보면, 불행하게도 금리인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동결을 지지했던 한 위원은 현재 우리 경제에서 기준금리를 낮추면 금융 비용이 낮아지면서 기업의 투자가 늘어나는 경로가 '신용 차별화'때문에 원활하게 작동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한다. 은행을 비롯한 금융회사들이 여러 이유로 투자위험을 적극적으로 감수하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 위원은 현재 저신용 중소기업은 물론 건설 부동산 조선 해운 철강 등 취약 업종 대기업에도 "시장금리 수준과 상관없이 자금 공급 자체가 거의 안 이루어지는 상황"이라고 지적했다.
반면 10대 그룹 계열 상장사의 지난해 유보율은 1,442%로 사상 최대 수준이다. 유보율은 기업의 잉여금을 자본으로 나눈 것으로 대기업들이 자기 자본보다 14배 이상 많은 돈을 쌓아두고 있다는 뜻이다. 한쪽에서는 돈이 넘쳐도 투자할 곳을 못 찾아서 쌓아두고, 다른 한편에서는 신용 부족으로 시중금리의 흐름과 무관하게 고리로 돈을 빌려야 하는 상황에서 금리만 낮춘다고 돈이 더 잘 돌 수는 없는 것이다.
가계 역시 마찬가지다. 세무조사 강화 소식에 놀란 일부 부유층이 골드바를 사 모으느라 때아닌 금괴 품귀 소동이 빚어지고 있는 순간에도 김광수경제연구소 추정으로는 월 소득보다 지출이 많은 적자 가구수는 310만 가구로 늘어나 전체의 23.5%에 달하고 있다. 이런 양극화는 신용등급이 높은 집단과 낮은 집단 사이에서 대출금리 격차가 급격히 벌어지는 '금리 단층 현상'(본보 6일자 17면)을 초래해 금리인하로 인한 경기부양 효과를 크게 줄이게 된다.
결국 정부가 나서 경제의 끊기고 막힌 부분을 찾아 손을 봐야 이번 금리인하와 추경이 기대했던 효과를 거두게 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최근 국회를 통과한 추경예산을 일자리 창출과 서민생활안정, 중소기업 지원에 주로 투입하기로 한 것은 정부가 문제의 맥을 잘 짚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추경의 규모는 문제를 해결하는데 여전히 부족하다. 특히 평생 실업자가 될 지경에 몰린 장기 실직 청년들, 사회안전망 부족과 저금리 속에 별다른 대책 없이 정년퇴직에 내몰리는 베이비붐 세대 등에게 좀더 적극적인 국가의 도움이 절실하다.
정영오 경제부 차장 young5@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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