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볕 따사롭던 7일 경기 포천시 소흘읍 무림리 348번지. 개신교 신자 공동체인 '사랑방공동체'를 찾은 손님을 제일 먼저 맞아준 것은 초등학교 저학년 아이들의 "꺄악, 까르르" 웃음 소리였다. 사랑방교회를 중심으로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대안학교와 생활공동체를 꾸리는 가족들의 집이 둘러싼 공동체 터전 한쪽에 제법 큰 텀블링이 있었다. 거기서 아이들 대여섯이 뛰놀며 재미에 겨워 내는 소리다.
"이곳 포천으로 온 지는 올해로 15년째, 내년이면 사랑방공동체를 시작한 지 30년 한 세대가 됩니다."
공동체라는 말만 꺼내도 '사상이 불순하다'는 의심을 받던 1980년대 중반 기독교공동체를 지향하며 정태일(67) 목사가 사랑방교회를 세울 때의 목표는 딱 한 가지였다. '교회의 본질이 뭘까 그걸 추구하자'. 새문안교회, 소망교회 등 큰 교회, 작은 교회에서 두루 목회를 하며 그는 "한국 교회가 하나같이 평화롭지 못하고 갈등, 분열되어 있다"고 느꼈다. 바른 교회란 어떤 것일까를 고민하는 그에게 돌아온 답은 "갈등을 극복한 공동체적인 삶(코이노니아)의 추구"였고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나라를 여기에 건설하는 것"이었다.
그런 교회는 시작부터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 정 목사는 서울 종로5가에서 처음 교회를 열 때부터 '3무(無)' 원칙을 세웠다. "사람을 모아 놓고 교회를 시작하지 않는다, 돈을 모아 놓고 교회를 시작하지 않는다, 교회 건물을 짓지 않는다." 지금도 사랑방교회에 이어져 내려오는 이 정신은 교회 창립 당시는 물론 여전히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문제에 대한 자성을 담은 것이다.
그래서 사랑방교회에는 창립 멤버가 따로 없다. 굳이 말한다면 정 목사 가족과 친척 몇 사람이 교회 문을 열 때 함께한 사람들이다. 지금 매주 사랑방교회에서 예배하는 300명 안팎의 교인들은 이 교회의 정신을 좇아 하나 둘 모여든 것이다. 새로 교회를 열 때는 목사가 손에 3억~5억원 정도 쥐어야 하는 게 '상식'이지만 돈이 중심이 되는 교회 운영을 거부하는 그는 임대 가계약금 20만원 남짓으로 출발했다. 지금도 조건 없이 이런저런 지원을 하겠다는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거절한다. 사랑방교회의 출발은 정 목사 살림집이었고 그 뒤 종로 4가의 건물 한 켠을 임대해 썼다. 포천으로 온 뒤에도 중고교 건물 강당에서 예배를 본다.
"기독교공동체 운동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교회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갈 때 기독교의 본질을 회복하자고 일어난 운동이 모두 이런 공동체 운동입니다. 예수의 성육신부터 기독교 초창기의 분파운동, 16세기 경건운동, 종교개혁, 19세기 부흥ㆍ성령운동이 지금 생명을 중심으로 삼는 공동체운동으로 이어지고 있는 겁니다."
사랑방공동체 이전에도 국내에는 예수원이나 한국디아코니아자매회 같은 기독교공동체가 있었다. 지금은 한국공동체교회협의회까지 운영될 정도로 개신교계의 관심도 커졌다. 그 가운데서도 사랑방공동체가 눈에 띄는 것은 정 목사가 공동체 운영에서 '교육'에 큰 비중을 두고 어린이집부터 고등학교까지 대안학교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랑방공동체는 수년 전 이 공동체의 틀을 ▦사랑방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목회 ▦기독교 대안학교인 사랑방공동체 학교 ▦함께 생활하며 나누고 기도하는 생활공동체로 나눠 정립했다. 이중에서도 공동체에 활력을 불어넣어주고 공동체 자체를 지속 가능한 것으로 만들어주는 것이 교육이다. 정 목사는 "종교개혁의 꽃도 칼빈의 제네바 아카데미였다"며 "기독교 신앙과 함께 하는 올바른 교육이야말로 한국 교회와 선교에 중요하다"고 말했다.
'참교육 작은 학교'를 모토로 하는 사랑방공동체의 학교는 한 학년에 한 한급, 학급 정원은 12명을 넘기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교육부에서 인가 받은 기관은 아니지만 일반 공교육 과정을 대부분 소화한다. 다만 수업의 비중이 다르고 일대일 맞춤교육을 한다. 이보다 더 눈 여겨 볼 것은 거의 매일 바깥에서 뛰놀고, 한 달에 한 번꼴로 여행이나 국토 순례를 하는 등 몸을 놀리며 체험하는 대외 활동에 적극적이라는 점이다.
공동체에 고민이 없는 것은 아니다. 학교의 경우도 무상교육을 하고 싶지만 재원이 충분하지 않아 얼마 정도 학비를 받는다. "공동체 자체 수입원이 있어야 한다"며 "농산물이나 농산물가공품 판매, 교육교재 제조 등을 생각 중"이라고 말하면서도 정 목사는 전혀 쫓기는 얼굴이 아니었다. "기도해 보고 하나님이 원하는 거라면 그냥 시작해 여기까지 왔으니까요."
다음은 사찰 운영을 불자에게 맡기고 수행 전념하는 마산 정법사 지태 스님
포천=김범수기자 bskim@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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