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사회에 강한 인상을 남긴 채 얼마 전 타계한 마거릿 대처 전(前)영국총리의 공과(功過)에 관한 논란이 분분하다. '복지병'을 치유했다는 찬사와 함께 심화된 양극화와 불평등의 원흉이라는 비판이 공존한다. 비스마르크 이후의 복지국가 전략을 송두리째 뒤흔들었던 대처리즘은 미국의 레이거노믹스와 함께 신자유주의의 대명사로 통한다. 웬만한 남자들은 비교도 안 될 카리스마로 세계를 호령한 그를, 역사는 '철의 여인'으로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금세기 주류경제학의 원론에 따르면, 복지를 주려거든 되도록이면 현금으로 주라고 한다. 현물이나 서비스로 복지를 주게 되면 개인의 효용극대화가 물 건너가기 때문이란 이유에서다. 사과를 원하는 자에게 배를 주면 안 된다는 원칙에 충실한 채, 20세기형의 복지국가는 현금복지를 위주로 채워졌었다. 한편, 지나친 현금복지가 근로회피의 도덕적 해이로 연결될 수도 있다는 경고음도 주류경제학에서 터져 나왔다. 국민들이 복지만 받고 일을 하지 않게 되면 실업증가와 성장저하가 야기될 것이고 결국에는 나라가 망할 것 아니냐는 우려, 이것은 대처리즘이 제기했던 '복지병' 담론의 핵심이기도 하다.
여기까지는 잘 알려진 일이지만, 마거릿 대처가 외쳤던 '복지국가 위기론'이 신좌파의 논리와 대동소이하다는 사실은 낯선 일일 것이다. 적의 적은 친구라고 했던가? '근로동기침해론'에 기대어 복지국가를 싫어한다는 면에서 신우파와 신좌파는 정말 많이 닮아있다. 극과 극이 통할 수도 있었던 반복지 담론의 태생적 한계이겠지만, 좌파와 우파가 한목소리로 주장했던 복지국가 위기론은 반만 맞는 이야기였다. 현존하는 복지국가에 위기를 가져왔던 진짜 이유는 이론이 아닌 오일쇼크의 현실에서 비롯되었던 것이다.
아랍의 산유국들이 '자원주권'을 주장하며 메이저 석유회사들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자 기름값은 천정부지로 뛰기 시작했고, 기름값이 오르면서 서구의 자본주의는 휘청거리기 시작했다. 오일쇼크 이후 만성화된 저성장은 서구 선진국들로 하여금 첨단산업화를 통한 생산성 향상에 매달리도록 만든 한편, 복지국가의 재정축소를 통한 시장자본주의의 투자활성화에도 관심을 갖게끔 부추겼다.
말이 좋아 생산성 향상이지 지식경제나 첨단산업으로의 전환은 대가가 컸다. '고용 없는 성장'과 그에 따른 양극화를 잉태한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이나 미국과 같이 복지마저 축소한 나라들에서는 빈부 격차가 도를 넘어 커지기 시작했다. 근로동기를 침해하는 현금복지는 줄이면서도 그 자체로 고용유발효과가 매우 큰 서비스복지를 늘렸던 나라들의 경우는 달랐다. 첨단기술경제로의 환골탈태 이후에도 사회적 충격을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1998년에 스웨덴이 현금복지인 연금의 개혁을 추진하고 사회서비스를 강화하는 등 고용유연성전략으로 돌아선 이후, 새로운 자본주의적 적응의 우수사례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스웨덴을 배우기 위해 슈뢰더 정부가 추진했던 '아젠다 2010'의 고용복지 결합전략은 정권이 바뀐 이후에도 메르켈 총리에 의해 확대계승 되었다. 지금 독일이 구가하는 경제적 부흥도 결국은 미리부터 준비한 복지전략의 수정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은 부인하기 힘들 것이다.
요컨대, 우리가 당면한 21세기 한국형 복지국가의 주된 역할은 고용에 이바지하고 불평등을 완화하는 것에 모아져야 한다. 고용을 만들어내는 복지는 사회서비스의 활성화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고, 불평등 완화를 위해서는 복지를 늘려야 할 것임도 분명해 보인다.
19세기 말,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20세기형 현금복지의 싹을 틔운 이후, 20세기 후반 '철의 여인' 대처가 신자유주의를 기치로 현금복지의 근로동기침해를 넘어서고자 했던 것이 우리가 기억하는 복지국가의 약사(略史)이다. 고용복지를 확충해서 한국의 낡은 자본주의를 개량하겠다는 초심을 잃지만 않는다면, 21세기 복지국가사(史)의 사회서비스전략 편에는 한국이 낳은 또 하나의 '철의 여인'이 기록될 수도 있을 것이다.
안상훈 서울대 교수ㆍ사회정책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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