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모, 나 무섭지?" 조카가 윗니로 아랫입술을 누르고 내 앞으로 얼굴을 바싹 들이밀었다. 앞니 두 개가 빠진 모습이 제 딴에는 송곳니를 삐죽 내민 괴물처럼 보였나 보다. "너무 무서워"하며 눈을 가렸더니 아이는 깔깔 웃었다. 동글동글한 우윳빛 젖니와 이제 막 톱니모양으로 돋아나는 반투명한 새 이. 아이의 입 속이 너무 예뻐서 나도 모르게 깔깔 따라 웃었다.
문득 피터 팬이 떠올랐다. 웃으면 젖니가 드러나는 피터. 영원한 아이 피터. 하지만 내가 피터 팬에 흠뻑 빠져있던 시절, 그의 이미지는 아이라기보다는 카리스마 넘치는 소년에 가까웠다. 동화책의 삽화들이 그랬고 뮤지컬과 영화 속 피터의 모습들이 그랬다. 그 멋진 피터가 산산조각 난 건 불과 몇 년 전, 완역본을 읽으면서였다. 카리스마는 개뿔. 웬디에게나 똘마니들에게나 이토록 형편없이 제멋대로인 꼬마라니.
그때 나는 젖니의 나이가 어떤 건지 잘 몰랐다. 젖니의 세계란 아직 인간의 규범이나 예의에 속박되지 않은 작고 연약한 '왕'의 나라라는 데에 생각이 미치지 못한 것이다. 이제 새 이가 뾰족뾰족 돋고 있는 조카를 보며, 나는 비로소 피터가 얼마나 작은 아이였는지를 새삼 깨닫는다. 젖니가 다 빠진 사람은 피터의 나라 네버랜드에서 무조건 후크 일당이라는 것도. 그러고 보면 나의 네버랜드는 늘 가짜였던 셈이다. 언제나 내가 해적의 편이었다는 것을 인정하게 된 지금에야, 나는 겨우 피터의 땅을 흘끗 엿본 듯한 기분이다.
신해욱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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