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된 말로 무라카미 하루키(64)는 이제 술집 냅킨에 낙서만 해도 책으로 묶여 전 세계에 팔리는 작가다. 뭘 썼는지보다 누가 썼는지가 더 중요한, 지구상의 몇 안 되는 작가의 반열에 그도 마침내 올라섰다. 여기에는 그의 소설보다 산문을 더 좋아한다는 커밍아웃이 그다지 부끄럽지 않을 정도로 빼어나고 재미난 에세이들을 선보여온 그의 이력도 한몫 하고 있을 터. 그에게 산문이란 보름 내 말 한 마디 안 하고도 아무 불편 없이 살 수 있다는, 인터뷰를 극히 싫어하는 작가가 내밀하게 독자와 만나 일상과 통찰 사이를 부지런히 오간 한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유일한 매체다. 물론 이 일상과 통찰 사이의 다리는, 잔잔하지만 강력한, 하루키식 일급 유머다.
이번 산문집 는 '무라카미 라디오'라는 제목으로 기획된 세 번째이자 마지막 책이다. 이번 책에는 하루키가 일본 패션 주간지 에 연재한 권두 에세이 52편이 담겼다. 소설에서는 눈치 채기 어려운, 그래서 듣고 나면 놀라운 그의 60대라는 생물학적 나이가 에세이에서는 오롯이 느껴지는 것도 근간에 나온 하루키 산문집을 읽는 재미 중 하나다.
그의 산문이 이토록 즐거운 것은 일체의 거들먹거림이 없이, 자신을 후줄근한 차림으로 집에 틀어박혀 소설이나 쓰는 아는 것도 별로 없는 못 생긴 아저씨 정도로 담백하고 영리하게 포지셔닝한 덕분이기도 하다. 너무도 소탈하게, 자신마저도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하루키의 자학개그가 이번 책 속 짧은 에세이들에도 즐비하다. 삶이 애티튜드와 스타일의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마저도 매혹시키는 하루키의 쿨하고 감성적이며 유머러스한 문장들을 만나는 즐거움이란.
TV 출연을 극도로 꺼리는 하루키에게 어느 날 NHK 교육방송의 연출자가 출연 제의를 했다. 언제나처럼 얼굴을 비치고 싶지 않다고 거절했더니 연출자가 "저희 프로그램 시청률은 2퍼센트 이하랍니다. 거의 아무도 보지 않습니다"라고 말했다고. 그때 하루키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 '"금방 끝나"하고 섹스하며 여성에게 다그치는 녀석이 지인 중에 있는데, NHK 연출자의 핑계는 그것과 좀 비슷했다. 그 말을 듣고 '그래? 바로 끝나면 됐어. 잠깐 해볼까' 하는 여성은 없을 테죠. 헌혈도 아니고.'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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