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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저마다의 자리에서 혁명 중이다… 사랑도 이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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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는 저마다의 자리에서 혁명 중이다… 사랑도 이념도

입력
2013.05.03 1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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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3년 프랑스에서 발간된 장편소설 의 작가는 로맹 가리(1914-1980)다. 이 사실은 미리 알고 있어야 할 필요가 있다. 이미 프랑스 문단을 평정한 저명 작가였던 로맹 가리가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소설을 발표해 기성 문단을 한껏 조롱하며 남몰래 두 번째 공쿠르상을 거머쥐었던 일화나, 미국 영화배우 진 세버그와의 격정적인 사랑과 한 해 사이 벌어진 두 사람의 잇단 자살이 준 충격 같은 극적 사건들이, 그를 아는 독자라면, 가장 먼저 뇌리에 떠오를 것이다.

여기에 빈한한 러시아계 유태인 이민자에서 외교관과 소설가로 승승장구하며 세속적 성공의 사다리 최상층부에 자리잡기까지 그가 살아 생전 누리고 겪은 존경과 질투까지 기억해두자. 전기와 행적이 기록하는 작가의 모습이 프랑스 길거리의 창부에서 영국 최고 귀족가문의 귀부인으로 변신한 소설 속 레이디 L의 모습과 고스란히 겹치기 때문이다.

여신처럼 아름답고 기품 있지만 악마적이라 할 만큼 냉소와 조롱이 온통 내면을 점거하고 있는 이 독특한 여인이 이토록 생생하고 입체적으로 그려진 것은 작가 자신이 바로 레이디 L인 탓이다. 레이디 L의 모델이 패션잡지 편집장이자 작가였던 첫 부인 레슬리 블랜치였다는 게 전기작가들의 중론이지만, 성별과 무관하게, 플로베르가 '보바리 부인은 나다'라고 한 말은 로맹 가리와 레이디L 사이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이 소설은 인류를 연적으로 둔 한 여인의 사랑 이야기다. 다른 여인을 질투하는 것과 인류 전체를 질투하는 것 중 어떤 것이 더 불행한지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19세기 말 이념과 혁명의 폭염기를 살아가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지닌 아네트 부댕에게는 후자가 압도적으로 고통스럽다. 자신의 매력적인 아나키스트 연인을 침대 바깥으로 꾀어내는 자유와 평등과 박애는 늙지도 않고 질투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 영원히 물리지 않는 연인이기 때문이다.

그 연인 아르망 드니는 말한다. '당신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하는데, 누군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지 않고서 어떻게 사랑할 수 있죠? 나를 사랑하면서 어떻게 동시에 나더러 완전히 달라져서 다른 사람이 되라고 요구할 수 있죠? 내가 혁명의 소명을 거부한다면 나라는 존재는 아무것도 남지 않게 되오. 나 자신을 포기하고 당신이 사랑하는 사람으로 남으라고 요구할 순 없소.'(115~116쪽)

술주정뱅이 아버지와 매음굴의 세탁부였던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아네트는 부모의 잇따른 죽음으로 자연스럽게 매춘부가 된다. 하지만 뼈가 부서지도록 노동하는 어머니가 벌어온 돈으로 만날 술을 퍼 마시며 노동 해방을 입으로만 부르짖던 아나키스트 아버지 덕분에 그녀에겐 생래적 미모와는 흔히 공존하기 어려운 지성의 기미가 깃들어 있다. 19세기를 풍미한 아나키스트들은 이 무렵 체제를 전복하기 위한 혁명에 필요한 자금 조달을 도모하고 있었다. 여기에는 더없이 아름답되 민첩한 재기와 모든 걸 빨리 배우고 기억하는 능력, 야심과 큰 용기까지 갖춘 여인이라는 미끼와 끄나풀이 필요했다. 사창가의 아네트는 누가 봐도 적임이었다.

어느 날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실존 아나키스트 아르망 드니의 기록에서 모티프를 딴 팩션역사소설 은 순식간에 귀족 가문의 젊은 미망인으로 신분이 세탁된 아네트가 귀족사회의 허위를 못 견디는 보헤미안인 영국의 괴짜 공작 글렌데일에게 접근해 그의 재산을 빼돌리려는 계략을 중심으로 연정의 삼각형을 그려나간다. 이 과정에서 펼쳐지는 흡사 19세기 유럽의 지적ㆍ예술적 풍속화를 보는 듯한 생동감 넘치는 묘사와 냉소적이면서도 유머러스하고 애잔하면서도 지성미 넘치는 서술이 읽는 이를 사로잡는다. 이를테면 엘리트들에게만 복무하는 예술에 이데올로기적 증오를 갖고 있는 아르망이 세계적 피아니스트를 납치해 매춘부들 앞에서 밤새도록 생애 최고의 연주를 하도록 만드는 장면 같은 것.

대개의 소설이 그렇지만, 로맹 가리의 소설은 더더욱, 결말을 위한 소설이다. 그런 일은 없지만, 혹여 소설 읽기가 흔쾌하지 않더라도, 마지막 페이지에 이르기까지 독자는 견뎌야 한다. 그 견딤은 끝내 읽는 이에게 인지의 충격을 가하고, 그 충격은 생의 통찰이라는 귀한 길목으로 짓궂지만 다정한 벗처럼 읽는 이의 팔을 슬며시 잡아 끌 것이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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