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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사용설명서로 통하는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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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사용설명서로 통하는 우리

입력
2013.05.02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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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난 지성만큼 촌철살인의 세태 비평으로 유명한 이탈리아의 학자 움베르토 에코는 1985년 워드프로세서 같은 당시의 첨단 기기를 쓰는 고충을 희화화했다. '사용설명서를 따르는 방법'이라는 글에서다. 그런 물건에 첨부된 사용설명서가 부피만 크고 필요한 내용을 마구 뒤섞어놓아 사용자에게 도움은커녕 골탕만 먹인다는 것이 글의 골자다. 에코는 사용법을 강사에게 배우는 방법도 지나가듯 언급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는 그 대목에서 강사의 "가슴에 총알 세례를 퍼부어라"고 조언한다. 그 범법 행위로 20년 형을 살더라도 "당신의 시간이 절약될 것"이라는 농담 아닌 농담과 함께. 요컨대 에코는 강사가 장황한 설명으로 사용자를 혼란스럽게 한다는 뜻을 그리 과장되게 표현한 것이다. 혹자는 거기서 전 세계가 무차별적인 테러로 신음하는 요즘 정세 상 공식 지면에서든 사적 대화에서든 민감한 문제로 비화할 수 있는 과격한 언사부터 꼬집고 나설 것이다. 그런데 내게는 그보다도 기계를 사용하는 법을 배우는 데서조차 사람 사이에서 이뤄지는 소통을 냉소하는 태도가 먼저 들어온다. 강변하지는 않았지만, 에코는 풍자의 가면 뒤에서 인간 대 인간의 관계가 수반하는 여러 현상을 비효율적인 것으로 평가 절하했기 때문이다.

삼십 여년이 지나 에코는 과거의 그 같은 발언을 자신의 다른 책에서 반성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우리 현실은 딴판이다. 지금 일상에서는 이를테면 '사용설명서의 인간화'내지는 '인간의 사용설명서화'가 어떤 의식적 거리낌도 없이 증폭되는 것 같기 때문이다. 연 초 '남자사용설명서'라는 영화가 개봉한 이후, 아마 그 영향인 것 같은데 도처에서 온갖 상황에 사용설명서란 용어를 붙이는 것이 일종의 대세다. 어느 드라마는 비정규직 근로자가 자신의 사용설명서를 만들어 정규직 비정규직을 차별하는 회사의 임원과 협상하는 모습을 당당하다고 묘사한다. 또 이러저러한 대중매체 기사나 광고, 연예오락 프로는 그 용어가 마치 우리시대 가장 재기발랄한 인간관계 개념인양 맥락에 아랑곳하지 않고 남발한다.

우리 각자 인간적으로 피곤하게 부대끼지 말고, 기술로 제작되고 매뉴얼에 따라 작동하는 일련의 기계장치처럼 기능적으로 삽시다. 불가피 우리가 관계를 해야 할 경우 사용설명서에 명시된 대로, 딱 그 설명만큼만 대가를 주고받으며 서로를 이용합시다. 어차피 우리 삶은 비즈니스고, 나와 당신이 함께 하는 이유는 돈으로 얽힌 계약 때문이니 말이죠. 이런 식의 마음과 태도가 요즘 유행하는 각종 '사용설명서' 문화의 배면에 짙게 깔려 있다고 말하면 내가 사태를 과장하거나 지나치게 냉소하는 것일까. 그런 식의 사고방식 및 인간 대우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는 예수의 말씀, '인간을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 대하라'는 칸트의 철학에 위배되는 불경하고 비이성적인 것이라고 말하면 철이 없거나 위선적인가. 세태를 잘 알고 현실의 쓴맛을 용의주도하게 조리할 줄 아는 이라면 그렇다고 할 것이다. '사랑' 대신 '사용'이 밥 먹여 준다고 말이다.

사실 인간의 문화란 본성상 쓸모없는 것들을 제거해나가고 개체의 효용성을 고도로 끌어 올려 공동체가 공존공영해온 역사의 과정이고 그 구축물이다. 이 점을 들어 존재가치 대신 사용설명서로 소통하는 지금의 우리를 정당화할 수도 있다. 그런데 마음이 차가워진다. 우리 모두가 사회, 지역, 국가 경제라는 이름의 거대한 시장 좌판에 깔린 한낱 상품처럼 보여서다. 아니면 최첨단에 글로벌하기까지 한 삶의 휘황한 밤을 밝히는 LED 전구 중 하나거나.

그렇게 차가워지는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는 이는 문화예술이 고수익 자본이 되는 이 시대에도 역시나 사회적 효용성이 떨어지는 예술가들이다. 독일 실험극 단체 리미니 프로토콜은 2008년부터 '100% 베를린' 같은 작품에서 공동체를 구성하는 인간, 그 생생한 존재 자체를 공연으로 실현시키고 있다. 난 거기서 사용법에 구멍을 내는 또 다른 우리를 본다.

강수미 미술평론가·동덕여대 회화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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