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보스턴 마라톤 테러가 발생한지 3주가 다 돼가는데도 파문이 가라앉을 기미가 없다. 폭발물에서 여성의 것으로 보이는 DNA가 발견된 데 이어 범인인 두 무슬림 형제 외에 추가로 3명이 기소되는 등 당국의 수사는 점점 더 속도를 내고 있다.
미국이 이번 테러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 하다. 9ㆍ11 테러 후 미국 본토에서 발생한 첫 테러인데다 범행 현장인 보스턴 마라톤 대회가 갖는 상징성 때문일 것이다. 철저히 정치성을 배제하는 스포츠를 이용해 무고한 생명을 빼앗는 행위는 어떤 이유로도 용납할 수 없고 되풀이돼서도 안된다. 그런 점에서 당국의 수사는 아무리 철저해도 지나치지 않다.
하지만 미국이 이번 사건에 접근하는 방식은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사건이 터지자 미국은 수사 당국과 정치권, 언론 할 것 없이 일제히 무슬림의 소행임을 단정했다. 결과적으로 무슬림이 범인으로 드러났지만, 수사를 해서 범인을 가려내는 것과 처음부터 편견을 갖고 범인을 예단하는 것과는 하늘과 땅 차이로 다르다. 언론의 오보와 당국의 마녀사냥식 수사가 남발된 것은 그런 점에서 당연했다. 언론은 까무잡잡한 피부색에 중동계로 보인다는 점만으로 생사람을 범인이라고 몰면서 1면에 대대적으로 오보경쟁을 벌였다. 연방수사국(FBI) 등 당국은 사우디아라비아 국적의 대학생을 현장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구금했다. 인터넷상에서는 사건 전에 이미 실종됐던 인도계 대학생이 무슬림과 비슷하다며 그를 테러범으로 지목하고 사진을 공개하는 등 마녀사냥식 신상털기를 자행했다. 이 대학생은 범인이 잡힌 뒤 숨진 채 발견됐다. 정치권도 마찬가지다. 보수성향의 공화당은 범인들 중 생포된 동생이 엄연히 미국 시민권자이고, 사건의 전모가 드러나지 않았는데도 그를 관타나모의 테러리스트에 덧씌운 '적 전투원'의 신분을 적용해 군사재판에서 다루라며 여론의 증오심을 부추겼다. 마치 온 미국이 광기에 휩싸인 듯 하다.
미국이 이번 사건에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무슬림이 또 엄청난 사건을 저질렀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왜 그랬는가 하는 이유를 찾는 것이다. 9ㆍ11 테러의 교훈도 그것이었다. 이번 사건은 미국이 9ㆍ11에서 교훈을 얻지 못했음을 보여주는 참담한 증거다. 무슬림을 악마로 몰면서 이들을 미래의 테러리스트로 만드는 대립의 풍토는 이번으로 끝내야 한다. 검거과정에서 숨진 범인 타메를란 차르나예프는 자신의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나는 한 명의 미국 친구도 없다. 나는 미국인들을 이해할 수 없다"고 썼다고 한다. 26살에 죽은 그가 2000년 미국에 이민 와 삶의 절반이자 청소년기의 대부분을 보내면서 한 명의 친구도 없었다고 비관한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 책임을 전부 본인에게 떠넘길 수 있을까. 불행하게도 미국에는 타메를란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툭하면 벌어지는 참혹한 증오범죄가 이를 증명한다. 2009년 뉴욕지하철 폭탄공격, 2010년 뉴욕 타임스퀘어 차량폭탄 공격기도 사건 등은 모두 인종적 종교적 소수들이 저지른 사건이었다. 매일 끊이지 않는 총기난사 사건도 결국은 사회적 편견과 불평등이 근원이다. 미국 언론들은 금융위기 이후 인종간 빈부격차와 교육격차가 더 벌어지고 있다고 경고한다. 개천에서도 용이 날 수 있는 아메리칸 드림은 점점 환상이 돼가고 있다. 9ㆍ11 이후 대규모 조직적 테러가 불가능해지자 알카에다가 새로운 악의 자양분으로 삼는 것은 '외로운 늑대'라고 불리는 자생적 테러리스트들의 도덕적 분노다. 이들은 전문 테러범과 달리 정치적 메시지나 동기가 강하지 않다. 더 이상 어찌해볼 수 없는 울분과 좌절감을 표출할 타깃을 찾을 뿐이다. 미국이 테러보다 외로운 늑대에 더 위기감을 느껴야 하는 이유다.
미국을 보면서 어쩔 수 없이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게 된다. 미국보다 덜할 지 모르지만 우리 사회도 복잡해지면서 소수와 약자의 권익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빈번하게 일어나는 불특정 다수를 상대로 한 무차별 폭행과 살인은 한국에서도 보스턴 테러 같은 비극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인지 모른다.
황유석 국제부장 aquarius@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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