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이계성 칼럼] 개성공단 허망한 꿈이 되는가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이계성 칼럼] 개성공단 허망한 꿈이 되는가

입력
2013.04.29 12:09
0 0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고려 왕조 망국지신(亡國之臣) 야은(冶隱) 길재가 500년 도읍지 개경을 필마로 돌아보며 읊은 시조 구절이 자꾸 머리 속에 맴돈다. 어제 개성공단 관리 인원들이 철수함으로써 2003년 12월 첫 삽을 뜬 지 10년 만에 개성공단의 운명이 경각에 달리게 되었다. 속단해서는 안 되겠지만 이대로 영영 폐쇄로 이어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사람 왕래 없는 건물이 폐허로 변하는 것은 잠시다. 힘차게 돌아갔던 기계들은 곧 녹슬고 공장 마당 이곳 저곳은 잡초로 무성할 것이다. 남북 화해ㆍ협력의 최후보루니 통일의 마중물이니 하는 거창한 의미 부여를 떠나 우리 한계 중소기업들의 희망이요, 5만 3,000여 북측 근로자와 그 가족 20만여의 생계 터전이던 곳이다. 남북 사람들 간 대화와 웃음이 있었고, 간식 초코파이를 받아 들고 즐거워하고, 부식으로 제공되는 고깃국 건데기를 남겨 싸가지고 돌아가며 가족들의 얼굴을 떠 올렸던 나날들이 아득한 꿈결 같은 옛일이 될 판이다.

그렇게 황량한 폐허로만 방치된다면 안보상으론 그나마 다행이다. 공단 착공 전 이 일대의 인민군 6사단과 64사단, 62포병여단이 10㎞이상 북쪽 후방에 재배치돼 사실상 휴전선의 북상 효과를 낳았다. 북측 개성공단 담당 실무기관인 중앙특구개발지도국 대변인은 엊그제 공단이 폐쇄되면 이 지역을 다시 군사요새화 하겠다고 밝혔다. 그리 되면 "서울을 더 바투 겨눌 수 있게 되며 남진의 진격로가 활짝 열려 조국 통일 대전에 유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중소기업들이 애써 지은 공장 건물이 인민군 막사가 되고 서울을 겨냥하는 장사정포의 은폐시설로 이용된다고 생각하면 정말 끔찍하다. 다른 남북협력 사업도 그렇지만 대다수 국민의 지지와 성원 속에 가동돼온 개성공단 사업도 상황관리에 실패하는 순간 우리를 향하는 위협으로 바뀌게 된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 시절 대북지원이 핵무기와 미사일이 되어 돌아왔다는 주장도 그 비슷한 것이다. 하지만 대북지원 자체보다는 상황을 관리하지 못한 실패가 더 문제다.

걷잡을 수 없이 파국으로 치닫는 개성공단 사태는 20대 후반의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이끄는 북한 체제를 상대하기가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를 잘 말해 준다. 북한은 지난해 12월 장거리로켓 발사와 2월 3차 핵실험에 대한 유엔 안보리의 제재와 압박 강화 국면을 한반도 위기를 가파르게 고조시키며 돌파해왔다. 어느덧 우리 정부는 물론이고 국제사회도 대화의 장으로 나오라며 북한을 달래는 분위기마저 느껴졌던 게 최근 상황이다.

그만하면 김정은 체제는 국제사회와 남한을 상대로 한 외교전에서 상당한 것을 얻은 셈이다. 그런데도 멈출 줄 모른다. 노자 도덕경에 '만족할 줄 알면 욕되지 않고 그칠 줄 알면 위태롭지 않다(知足不辱 知止不殆)'고 했다. 개성공단 가동 중단이라는 강공책을 들고 나와 결국 폐쇄로 몰아가는 것은 중대한 실수다. 지금 개성공단의 운명이 경각에 달린 상황을 누가 가장 반기는지를 돌아보면 자명한 일이다. 한국과 미국의 대북 강경파들은 오래 전부터 개성공단 폐쇄를 주장해왔다.

강경 군부에 휘둘려서든 젊은 지도자의 혈기 탓이든 자신들에게 결국 손해가 되는 강경 일변 노선을 고집하는 것은 김정은 리더십의 불안을 뜻한다. 노회한 할아버지나 아버지 같았으면 상황을 이렇게까지 어렵게 몰고 가진 않았을지 모른다. 그런 김정은의 불안한 리더십을 상대해야 한다는 데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내걸고 있는 박근혜 정부의 어려움이 있다. 하지만 그런 어려움을 감안하더라도 정부가 하루 시한의 최후통첩과 즉각적인 잔류 인원 철수 결정을 내린 것은 아쉬움이 있다. 좀더 여유와 인내심을 갖고 상황을 이끌어 갈 때 개성공단이 허망한 꿈으로 끝나지 않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계성 수석논설위원 wkslee@hk.co.kr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