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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꿈같은 날이…" 태국인 신부 화사한 미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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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꿈같은 날이…" 태국인 신부 화사한 미소

입력
2013.04.28 18: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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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이렇게 좋은 날 왜 울어. 오늘 엄마 너무 예뻐서 못 알아볼 뻔했다니까."

하루 종일 씩씩하던 엄마 렉(37)씨가 결혼식장에 들어서기 직전 눈시울을 붉히자 딸 태린(11)양이 황급히 엄마의 눈물을 훔쳤다. 이내 식장 문이 열리고 렉씨 부부가 경쾌하게 첫 발을 내딛자 200여명의 하객들이 일제히 일어나 힘찬 박수를 보냈다.

봄꽃의 향기가 감도는 28일 오후 서울 용산구 한남동 블루컨벤션에서 아주 특별한 결혼식이 열렸다. 저마다 결혼식을 올리지 못하는 아픈 사연이 있던 태국 출신 근로자 아홉쌍을 위한 '2013 다문화 및 외국인 근로자 합동결혼식'이 펼쳐진 것.

18명의 주인공들은 이날 꼭두새벽부터 메이크업, 야외 및 실내 카메라 촬영, 리허설까지 빡빡한 일정을 소화해야 했지만 얼굴에는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특히 이혼의 아픔을 겪은 렉씨에게 이날의 감격은 남달랐다.

1999년 한국인 남성과 결혼하며 한국 땅을 밟은 렉씨는 4년 전 결혼 생활의 마침표를 찍고 홀로 태린양을 키웠다. 렉씨는 "만삭에도 일하며 (전) 남편의 빚을 갚는 것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남편이 제 국적 신청을 계속 미뤄 불안한 신분으로 살아야 했던 것"이라며 "한국에 온 지 14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그때그때 비자를 연장하며 머물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완전히 한국 사람인 딸을 생각해 태국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그러다 3년 전 같은 공장에서 일하던 태국인 맛(38)씨를 만나 서로를 반려자로 맞기로 했다. 맛씨도 비자가 만료돼 지난 1년 간 맛씨가 3개월마다 방문비자를 얻어 한국을 오가는 기러기 부부 생활을 했다.

현재 경기 화성시 공단 주변에서 작은 태국 전통과자점을 운영하는 렉씨는 "전 남편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던 친정 부모가 걱정이 많으셨는데 결혼식 소식을 듣고 '한국에도 좋은 분이 많은가보다'며 한없이 감사하다고 했다"고 말했다. 그는 "결혼식의 꿈도 이뤘고, 이젠 남편과 한국에서 일할 날이 온다면 더 바랄 게 없을 것 같다"고 덧붙였다.

화성의 플라스틱 사출공장에서 일하는 엡(36)씨와 따(36)씨 부부도 "꼭두새벽에 일어났지만 힘들기는커녕 좋기만 하다"며 벅찬 소감을 전했다. 생활비도 아껴야 하는 형편에 결혼식은 언감생심이라 10년째 혼인 신고만 한 상태였던 이들은 "결혼식은 포기했었는데 이국 땅에서 기적이 이뤄졌다"며 기뻐했다.

이날의 주인공 중에는 태국에 남겨두고 온 아내와 남편이 다른 사람을 찾아 떠난 아픔을 갖고 있는 똔(43)씨와 왓(44)씨도 있다. 같은 상처에 공감하고 위로하던 이들은 결국 부부로 새출발하게 됐다.

이들에게는 불가능한 꿈에 가까웠던 이날의 결혼식은 20여개 단체와 개인들의 도움으로 이뤄졌다. 다문화지원단체 바롬생각이 주관하고 전문인연합 더블레싱 투게더와 외국인노동자를 지원하는 새생명공동체(NLC) 코리아가 기획했으며, 여성가족부, 용산구청, 웨딩 관련 업체들이 후원했다. 장소와 연회 일체를 제공한 블루컨벤션 관계자는 "평소 열악한 환경에서 고된 일을 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우리가 먼저 사랑을 베풀고 안아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이들의 안타까운 사연을 듣고 기꺼이 동참했다"고 말했다.

NLC코리아 홍광표 대표는 "2년 전 영국의 한 조사에 따르면 태국인이 가장 싫어하는 나라 1위가 한국"이라며 "한국에서 부당한 대우를 받고 있다는 인식 때문"이라고 말했다. 한국에 거주하는 태국인은 4만3,000여명. 이중 상당수가 공단에서 일하는 근로자이다.

태국 출신으로 한국인 남편과 사별하고 태국인 여성들을 돕고 있는 정완(43)씨는 "비용 때문에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채 살아가는 이들이 많은데 오늘 주인공들에게는 평생 잊지 못할 선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송은미기자 mysong@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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