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보성군 율어면 율어리. 보성 하면 떠오르는 녹차밭 지역에서 북동쪽으로 23㎞떨어진 이 마을 입구에서 굽이굽이 좁은 도로를 따라 들어가면 목조로 된 '문형식' 가옥이 나온다. 1900년대에 지어진 남도 내륙지역 특성을 많이 갖춘 집으로 중요민속자료 제156호로 지정된 곳인데, 1984년 지정 당시 문형식씨 개인 집이어서 문형식 가옥으로 이름 붙여졌다.
지난 22일 오후 2시30분 문화재청 산하 국립문화재연구소 조사원 3명과 함께 탐지견 두 마리 보배(10살·암컷)와 보람(10살·수컷)이 등장했다. 차에서 내리자 마자 훈련사 박병배(33) 이명호(35)씨와 짝을 이룬 보배와 보람은 헉헉 거친 숨을 내쉬더니 킁킁대며 여기저기 냄새를 맡느라 정신이 없다.
이씨의 수신호와 휘파람에 탐지견 경력 7년차 보람이가 3분도 안돼 땔감용 나무를 주시한다. 목조 문화재의 천적으로 꼽히는 흰개미를 찾았다는 뜻이다. 이는 주시법이라 불리는데, 목조 건축물을 훼손하지 않기 위한 탐지견의 반응법이다. 흰개미를 찾은 보람이에 대한 보상은 테니스공. 이 씨가 테니스공을 던지자 재빠르게 낚아채 입안에 물고 있다. 흰개미를 찾았을 때도, 찾은 부분을 주시할 때도 보람이는 연신 꼬리를 흔들어 댄다. 이씨는 "공을 몰래 뒤에서 던져주는데 탐지견들은 공이 기둥에서 튀어나온다고 생각한다"며 "흰개미 찾기를 놀이로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보람이와 보배의 활약으로 이곳에서만 사랑채, 안채, 곳간채 기둥에서 흰개미를 찾아냈다.
다음 장소는 보성읍 득량면 오봉리 강골마을의 '이용욱' 가옥. 1835년 이진만이 지었다고 하는데, 이 지방 사대부 집 건축양식을 보여줘 중요민속자료 제159호로 지정됐다. 이번에는 보배의 활약이 두드러졌다. 보배는 2003년부터 8년간 폭발물 탐지견으로 활동하다 지난 해부터 흰개미 탐지견으로 전향했다. 별당채부터 안채까지 샅샅이 훑으면서 흰개미가 있는 곳을 5군데 이상 금새 발견해냈다. 겉으로는 멀쩡한 데 기둥 안쪽에 흰개미가 있었던 모양이다. 보배가 지나친 곳은 보람이가 한 번 더 체크했다. 박씨는 "탐지견들이 가끔 혼동하는 경우도 있고, 워낙 똑똑하다 보니 쉬고 싶어서 멈추는 경우도 있는데, 이때는 다른 탐지견으로 중복 탐지하게 한다"고 설명했다.
어떻게 후각만으로 흰개미를 찾아내는 게 가능할까. 탐지견의 후각은 인간보다 최소 1만배에서 100만배까지 뛰어난데 개의 후각세포가 2,3억개로 인간의 500만개보다 월등히 많기 때문이다. 보람과 보배는 흰개미에게서 나는 특유의 페로몬 향을 통해 다른 사물과 구별한다.
이후에도 '이식래' 가옥과 '이금재' 가옥, 정자(亭子)인 열화정까지 6시가 다 돼서야 이날 업무가 끝났지만, 보람이와 보배의 열정은 식을 줄을 몰랐다. 이는 탐지견의 요건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부분이다. 탐지견은 활동적이고 외향적인 성격에 다양한 환경에서 활동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에버랜드가 위탁 운영중인 삼성생명 탐지견센터 측은 "사물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고, 기호품에 대한 강한 집착과 소유욕이 있어야 한다"며 "대표적 견종으로는 보배와 보람 같은 잉글리시 스프링거 스파니엘과 래브라도, 비글, 셰퍼드 등이 꼽힌다"고 말했다.
흰개미 탐지는 1990년대부터 진행되어 왔지만 탐지견이 투입된 건 2007년부터다. 국가기관과 민간기업이 공조해 문화재를 보존하자는 취지로 문화재연구소와 삼성생명이 '한 문화재 한 지킴이 협약'을 맺은 것이 계기였다. 이후 탐지견들은 5년간 402개동의 목조문화재에서 흰개미 퇴치에 앞장서 왔다. 2009년에는 문화재지킴이 활동우수사례 단체상까지 받았다.
국립문화재연구소 보전과학연구실의 서민석 연구사는 "그간 육안으로 흰개미를 관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탐지견은 흰개미가 왔다간 흔적까지 밝혀내기 때문에, 탐지효율이 훨씬 높다"고 말했다. 그는 "이제 흰개미 조사를 하러 가면 거주자들이나 주변인들이 탐지견을 보고 먼저 알아봐 준다"며 "탐지견들은 목조문화재 실태조사를 알리는 일등공신 역할까지 한다"고 귀띔했다.
보성=고은경기자 scoopko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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