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인류 최초의 화석으로 알려졌던 '루시'의 발굴은 지구라는 행성을 뒤흔든, 떠들썩한 고고학적 사건이었다. 루시가 여성이었던 것도 한 원인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상징 체계에 절묘하게 부합하는 데가 있다. 모든 존재는 어머니에게서 비롯되므로, 누구에게나 최초의 인간은 어머니, 즉 여성인 것이다.
'사회파 작가' 김숨(39)의 새 장편소설 은 인류 최초의 여성 루시를 숨 막히고 건조한 후기산업사회의 사막 속으로 다시 호출한다. 소설은 친밀성과 감정마저도 기꺼이 노동으로 환산하고 마는 자본주의의 가공할 괴력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지고 마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그린다. 어떤 각박한 사정과 세파에도 가족은 최후의 은신처여야 한다는 게 어쨌거나 우리의 공식적 입장이었다. 그러나 소설은 이제 그 이데올로기가 완전히 무너지고 버려졌음을 건조하고도 히스테릭한 화자의 목소리로 만천하에 선포한다.
저임금 감정노동자인 '그녀'와 무임금 돌봄노동자인 '여자'의 대립과 충돌로 구성된 소설의 서사 구조는 외견상 며느리와 시어머니의 고부 갈등 형식을 띤다. 전문대를 졸업한 후 15년째 홈쇼핑회사의 콜센터 상담원으로 일하고 있는 '그녀'는 지방 삼류대학을 나와 작은 토목회사에서 일하는, 쥐꼬리 만한 월급을 받는 남자와 결혼함으로써 '여자'의 며느리가 됐다. 그녀의 유일한 자랑은 정규직이라는 것.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성난 고객의 목소리와 변태 성욕자의 음담패설까지도 친절한 응대로 견디게 해준다.
반지하방에서 시작할 뻔한 신혼 살림을 18평짜리 서울 변두리의 빌라 전세로, 그 전세를 재개발의 호재를 기대하며 자가로 바꾼 것은 며느리였다.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한, 파출부와 요구르트 아줌마와 반찬가게 주방 일을 전전하며 홀로 삼남매를 키운 '여자'는 이에 공헌한 바가 거의 없으므로 이 가정의 대소사에 발언권이 없다. 며느리는 시어머니 앞에서 무능한 남편을 욕보이는 데에도 일말의 거리낌이 없다.
'시월드'로 통칭되는 일반적인 고부 관계 패턴과 달리 이 소설의 서사는 시어머니에 대한 며느리의 일방적인 모욕과 멸시, 불만과 짜증이라는 히스테리의 에너지로 추동된다. 시어머니는 화석처럼 묵묵히 침묵으로 이 모든 부당한 것들을 감내할 뿐이다.
작가는 육아를 매개로 공생하게 된 이들 고부의 관계를 생물학의 냉담한 시선으로 불편하고도 위태롭게 묘파해간다. 이들의 서식지는 수돗물이 끊어진, 토막 낸 아귀의 비린내와 물을 내리지 못한 변기 속의 오줌이 풍기는 지린내가 진동하는 18평 빌라. 그 안에서 심각한 구강건조증으로 입 속의 침이 바싹바싹 말라가는 시어머니와, 직장에서 해고돼 더 이상 시어머니와 공생할 명분을 찾지 못하는 며느리가 벌이는 날카로운 신경전은 김숨 특유의 불안하고도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알레그로의 빠르기로 고조시킨다.
수돗물이 끊긴 한나절에 갈등이 켜켜이 축적된 과거의 사연들이 중첩되는 형식으로 되어 있는 소설은 그 자체로 시대의 날카로운 풍속도이기도 하다. 홀시어머니를 모시고 살겠다는 며느리의 제안은 돈 안들이고 아이를 키우기 위한 경제적 전략. 입주도우미를 능가하는 열정과 솜씨로 가사와 육아를 도맡아 해결해주던 시어머니는 그러나 그녀가 집에 들어앉게 되자 암도 아닌 고작 구강건조증으로 약값만 축내는 잉여의 존재로 전락한다.
소설은 3인칭 화자를 내세우고 있지만, 한 번도 시어머니의 목소리로 서술되지 않는다. 침이 말라 물에 말지 않고서는 밥조차 먹을 수 없는, 하루가 다르게 여위어가는 시어머니의 모습도 며느리의 눈을 통해서만 그려질 뿐이다. 도통 말이 없는 어머니, 의뭉스럽도록 속을 모르겠는 어머니. 위세당당한 며느리에 짓눌린 그 어머니는 고작해야 몇 번의 말대꾸와 며느리의 신경줄을 태엽 감듯 팽팽하게 잡아당기는 단수의 내막으로만 자신을 드러낸다. 그리곤 조용히 내파하며, 종내 몸 안의 모든 체액을 말려 화석이 되려는 듯, 공사장 흙구덩이 속에 드러누워 '루시'가 된다.
작가는 작가의 말에 "오늘 밤 꿈에서 그녀를 만나면, 그녀가 누구든 "당신은 존귀한 존재"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습니다. 감히 '존귀함'에 대해 쓰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적으며 어머니 편에 서서 역성을 들었지만, 소설을 읽는 동안 작가가 며느리에게 불공정했다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제 자식은 브랜드 아파트에서 남 부럽지 않은 조기교육을 시키며 생존에 유리한 돌연변이로 진화하도록 키우고 싶어하지만, 시어머니를 착취하는 그녀 역시도 결국은 루시의 운명에서 자유롭지 못한 어머니이기 때문이다.
박선영기자 aurevoir@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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