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검찰청 중앙수사부가 23일 간판을 내렸다. 1981년 4월 기존의 특별수사부를 중앙수사부로 개칭해 공식 출범한 지 32년 만이다. 수 많은 대형 사건 수사를 통해 '검찰 특수수사의 상징'으로 불리던 것과 함께 '과도한 검찰 권력과 정치 검찰의 상징'으로 비판을 받던 영욕의 시간을 뒤로 한 채 쓸쓸한 퇴장을 맞게 됐다.
대검찰청은 이날 오후 대검찰청 청사 10층에서 채동욱 검찰총장 등 대검 간부와 소속 검사들이 참석한 가운데 '대검 중수부 현판 강하식'을 갖고 중수부 활동을 마무리했다. 법무부는 이미 지난 5일과 18일 검찰 인사를 통해 중수부장과 중수부 수사 기획관 등의 자리를 공석으로 남겨 뒀다.
2005~2006년 중수부장이었던 박영수 전 서울고검장은 이날 "국민은 거악 척결의 큰 칼, 질서와 정의를 써 내려간 굵은 붓, 전체 검찰의 피와 땀의 결정체였던 중수부를 잊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특히 1961년 중앙수사국 설치 이후 특별수사부, 중앙수사부로 명칭과 역할이 조금씩 바뀌어 왔던 대검 중수부는 권력형 비리 사건 등 국민의 이목이 집중되는 사건을 수사하며 특별수사의 중추로 기능해 왔다. 중수부는 사실상 첫 수사인 이철희ㆍ장영자 부부 6,400억 어음 사기 사건(1982년)을 시작으로 수서지구 택지 분양 비리사건(1991년), 율곡사업 비리사건(1993년), 노태우 비자금 사건(1995년), 불법 대선 자금 사건(2003년), 현대자동차 비자금 사건(2006년), 저축은행 비리 사건(2011~2012년) 등 굵직한 사건을 처리했다.
수사 결과 역시 화려했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을 구속기소 했으며 김현철, 김홍업 등 대통령 아들, 대통령의 형제(노건평, 이상득, 전경환)를 기소했다. 또 수 많은 정치인들과 재벌 총수들도 중수부 수사로 법의 심판을 받았다.
김영삼 전 대통령 아들 김현철씨를 구속 기소했던 심재륜 전 중수부장과 2003년 현직 대통령(노무현)과 야당 대선 후보(이회창)의 대선자금을 파헤친 안대희 당시 중수부장은 국민 검사로 국민의 성원을 받았다.
정치권의 중수부 폐지 시도에 "내 목을 먼저 치겠다"(송광수 전 총장)고 할 정도로 검찰 내 자부심도 상당했다. 현재까지 중수부장을 거친 31명 가운데 이종남 전 감사원장, 김두희ㆍ정성진ㆍ김태정ㆍ이귀남 전 법무장관, 안대희 전 대법관, 박순용ㆍ이명재ㆍ김종빈 전 검찰총장 등 대부분이 검찰 내 최고 요직을 거친 것도 중수부가 가진 상징성의 결과였다.
하지만 검찰이 무소불위 권력집단으로 인식되며 중수부는 개혁 대상 1순위가 됐다. 2000년 주가조작 등으로 수사 받던 이용호씨와 관련한 수사정보가 새면서 '이용호 게이트'가 번져 신승남 전 검찰총장과 김대웅 전 중수부장이 기소되는 아픔을 겪었고, 2009년 박연차 게이트 수사 때는 노무현 전 대통령을 소환 조사 후 20일 넘게 시간을 끌다 노 전 대통령의 자살이라는 비극을 낳기도 했다. 특히 수사 내용을 검찰이 언론에 과도하게 흘렸다는 비판을 받으면서 사실상 중수부가 '정치 검찰'의 오명을 쓰기 시작한 것도 이 때부터였다. 이후 중수부는 검찰총장의 하명을 받아 특정 정당과 정치인을 대상으로 한 '정권 눈치보기 표적 수사'를 한다는 의혹에서도 자유롭지 못했다. 지난해 11월 한상대 총장의 퇴진문제와 중수부 폐지 문제를 두고 한 총장과 최재경 중수부장 등 특수부 검사들 사이에 빚어진 검란(檢亂)은 중수부 폐지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됐다.
남상욱기자 thoth@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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